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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시집
친구의 시집
허름한 서점 한 귀퉁이 누워서
몇 개의 계절과 패배한 사랑이
씁쓸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시집
활자로 바뀐 우울한 이야기는
결국 가난했을 그의 아내와
애들 콧물이 배어난 종이 위에서
엉거주춤 가랑이 새로 지나가던 피다만 목마름
바람 한 모금이 흘깃 뒤적이다 놓고 간
부끄러움이나 자책은 아닐까.
오늘 밤엔 걱정이 된다.
부동의 그리움으로 머리칼을 흩날리다
목마른 인간으로 사라진다는 것
먼지 낀 서점 한 귀퉁이 웅크린 채
조약돌같이 달빛을 기다리던 슬픔 한 묶음
산다는 슬픔의 그림자에 이르는 길
그의 그림자가 넘어지며 포개지듯
내 책상에 돌아와 있어야 할 것만 같은
한 권의 야윈 시집
괴저병(壞疽病)
꿈결이라도 하늘로 올라 가슴을 꺼내 터트려보자.
하늘마저 무너트려 엄청난 함박눈 쏟아내보자.
하얗게 떠돌아도 내려 딛지 못하고
눈도 눈끼리 부둥켜 우는 밤
까만 재만 내리는 이 지상으로 채 못 탄 세포들
붉은 피로 방황하는 겨울을 만나보자.
아픔도 지치면 썩어가는 발가락 끝처럼
저승의 아픔으로 눈밭을 걸어가보자.
어쩌다 세포도 썩어가는 삶
모르스 부호로 내리는 자음 모음의 아우성이
잠자지 않는 허공으로
너는 죽은 것보다 산 것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되고
살아야 할 것 때문에
분분이 엎어지던 눈발이 된다..
여윈 아내의 가슴, 어린 딸도 방황하는 밤하늘
벌판 멀리 승냥이 울음으로 엄습하는 가난과
공기처럼 목숨을 조여 오는 생활고
그러나 어차피 만나야 한다.
상처를 치료하는 더 큰 아픔
죽음을 건지는 더 큰 가난
오늘 밤에 할 일은 칼을 드는 것
상한 가슴을 도려내고 백지를 펴는 것
뼈다귀 하나 때문에 개가 되는 짐승의 세상
전장(戰場)을 떠나 호숫가에 서는 것
모든걸 꼬옥 짜서 물로 흘리는 것
떠나가게 바라보는 것.
안타깝구나 ,
울음 하나 내릴 곳 없어 떠도는 밤
나는 오늘도 눈으로 흩날리는 너의 슬픔을 보며
잠들지 못하고 이 편지를 쓰나니
저 들 밖에 우는 자여
죽음으로 가는 길목마다 살아나는 새 피톨
저 흰 들의 소복 속에서 싹을 틔우는 억만의 너를 본다.
문병
발을 잘라내야 하는 친구의 병실에
먼저 잘라진 희망이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다
손거울 만큼의 별빛이 눈물로 떠
세포의 괴사를 비추고
고적한 얼굴이 육신의 분리를
남의 것처럼 맞으려 초연을 가장하고 있다
보내야 하는 일부
42년 내 몸이었던 이 아픈 동료를
눈물쯤으로 다 안타까울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나이던 나를
도려내고 서로 바라보아야 하는 밤
어둠도 이 헤어짐보다 더 진할 수 없다
바람이 없어도 흔들리는 촛불의 심지
아내와 와 보지 않은 어린 딸애가 어리는 눈
눈뜨지 않고 고개 숙인 병실의 기다림
이 모든 것이 정물처럼 멈춰진 공간에
상처 되어 가라앉는 지나온 날들
잘라 볼 수 없는 한 줄기 인생
썩은 살을 움켜 잡고 계속 이어져있는 삶만이
예고 없이 멈춰버린 시계추처럼
눈뜬 채 떨어져 있다
편지
- 선생님 친구에게
고생 많았네
40 중반 저 벌판 양 떼 몰고 넘어온 세월
전자가 인류를 가르치는 세상 어언 20세기 말
섬마을 등대로 오케스트라 지휘봉으로
컴퓨터론 계산되지 않는 뜨거운 가슴 하나 들고
강단을 지켜온 막소금 역할
눈빛을 마주하는 선분홍 심장 열고
눈물의 매로 가르친 마지막 교사
고생 많았네
오늘은 스승의 날
IMF로 증권사 친구 죽은 날
이제 그늘 길 슬픈 아이, 대책 없이 구겨져가는 아이
한 번만 잡아주면 사람의 세상 서서 갈 지친 아이
입김으로 불어주게 손 끌어주게
까짓 잡놈의 동네에 사기꾼이 번뜩여도
자네 아니면 누가 뜨거운 번민을 쌓겠나
떨어진 꽃잎을 모아 꽃봉오리 피우겠나
모든 열 토해 지금보다 올곧을 수 있다면
한 뼘 만치라도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뜨거운 정 온몸에 끼얹고
자네 남은 세월 분신해 주게
참으로 고생 많았네
오늘은 스승의 날
자네가 몹시도 그리운 날
배 타는 친구 1
배 타던 친구 닻을 내린다
항구는 팔 벌리고
파도 재워 배를 안는다
포구는 해말이 술렁이는 저녁을 짓고
황혼이 켜진 바닷가 횟집에서
가슴을 파고드는 소줏빛
이야기와 만난다.
머리칼을 파고드는
석양을 따라
함께 그리워해보는 지워져 간 것들
시간을 버린 자인가
아쉬움만 묻혀오는 바람
선 굵은 표정 깊이 불빛이 흐르고
거리는 지난 것들을 반추하는
고요만 남는다.
술잔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파도 위나 수평선 너머
또 하나의 바다에서
서성이며 떠도는 우리를 본다.
떠날 것들만 가득한 유리창 너머
어디로 향하는 듯 날갯짓하는 겨울갈매기
어두워오는 항구의 언저리만 날다
끝내 바삐 챙겨야 할 생활을 바라본다
먼 포구를 향하는 또 다른 그리움
탐조등처럼 켜진다
배타는 친구 2
사십이 넘은 그는 떠난다
챨톤 해스톤의 끝내지 않은 듯한 미소 감추며
손 한 번 목숨처럼 쥐었다 놓고
항구를 향한 밤거리로 지워진다
해마다 치뤄지는 만남과 이별이건만
늘 처음처럼 안겨 드는 썰물
피부 같은 가난의 유물과 몹쓸병 같은 모질지 못한 성품
시시때때로 쓰러지는 육신 세워 수척한 생활로 엮여온 우리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장한 이 세상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생생할 수 있겠느냐
한숨 속으로 접어버린 것들
뱃전의 포말로 띄워버린 것들 이제 만날 수 있을까
답답하게 떠남만 반복되고 나이만 주름을 파고드는데
거대한 무엇이 인생을 헝클어 기약 없이 바다로 내몰고
아내와 애들은 작은 항구도시에서 한 번에 일 년씩
몇십 번을 기다리며 바래가는데
이렇게 말짱히 살아
아쉬워하는 아내와 삐약거리는 새끼 차고
상봉과 이별을 반복하는 이 세상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버젓할 수 있겠느냐
독립문 형무소 공원의 땡볕에서
작은 담장을 넘으며 뛰노는 저 아이들이 유일하게
우리의 견뎌온 세월 속에 아픈 축복으로 자라고 있다
우리의 유년과 다른, 애들의 눈빛과 피어나는 비명
싱싱한 젖비린내가 눈 시리게 풀밭에 푸득이고 있다
목숨과 맞바꿀 이 사랑 하나 마련키 위하여
평생을 살아 바다를 기다리는 눈물, 바다를 버리는 눈물
친구여 언제나 이 애뜻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목숨 끝에 독초처럼 켜진 가난과
거쳐야 할 항구들이 경고등을 늘 껌뻑여
이 목소리 이 목숨이 풀 흔들림인저
걸걸한 목청 하나 찬댓소리로 불러 볼
짙디 짙은 노래 한 곡
목탁소리 풍경소리 아무렇게나 모여
참으세요 참으세요 한다
친구여 언제까지 이 인내는 생생할 수 있으며
우린 언제나 기다림을 닫을 수 있겠느냐
스페어 운전기사
흙 속에 누워있는 식솔들
먼지 펄럭이는 마른 가슴에 품고
한줌의 먹이를 구하러
도시 속으로 떠나는 사람
누구도 춤추고 노래할 수 없어,
사그러진 모닥불처럼
침묵하는 달빛 눈동자들
비처럼 별빛이 내리는 강가 천막
조약돌처럼 다소곳한 기다림 속에서
매만져지는 지난 날
그때부터 떠나는 자는 언제나
초생달처럼 창백한 얼굴로 갔지
간다.
초승달 걸린 밤
몸 떠는 키 큰 나무 지나
바람 내음 푸석한 황톳길로 좌회전해 간 사람
붉은 먼지 한 올만 사윈다.
순대국집
독립문 시장 순대국집 아줌마
십년 전 얼굴로 날 맞네
애들은 장성해 걱정하던 소원 이뤘고
손주까지 어여뻐 내 애 보는 눈길 따숩네
-손님들이 보고싶어 또 시작했어-
이십 여 년 단골 얼굴 삼삼해 행주 차고
청소부,시장통 아저씨 서서 먹는 탁배기 한 사발
썩썩 썬 머리고기 서너 첨 인심 좋게 놓네
그랬지 20년 전에도
대학생이 과외공부 시키랴 얼마나 배고프냐며
시키지 않은 순댓국에 소주까지 반 병
그 인심 변함없어 누구만 나타나면
친척 안부까지 전달하며
후한 웃음 베푸는 아줌마
-집의 어머니와 한 살 차이여 친구였지-
아버지 어머니 돌아 가신지 이미 알고
옛 고생 당신 것인 양 글썽하며
금시 따라가 옛 얘기나 나눌 듯
정 많아 보고픈 사람도 많은 분
백화점 유통 센터 거대한 상가에 밀려
꾀죄죄한 좌판과 할머니들만 지키는 독립문 재래시장 골목
찌그러진 양은 솥뚜껑 새로 빠져나간 세월이
흰 머리칼과 주름을 그었는데
김을 뿜으며 아바이순대 과부순대 버무려 쌈고
머리고기 무르도록 찐 살집에 썩썩 뜨거운 칼 맛까지 내
돌아오면 돌아오는 대로 떠나면 떠나는 대로
오늘도 두툼한 손으로 고기 첨 집어
백년 사위처럼 먹여 보내는 순대국집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