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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 하나의 행복

   작별인사

            --깃발

견디기 위해 남아있진 마라

용서하기 위해 기억을 쌓지는 마라

강하게 놓여지기 위해

상처 깊숙히 당겨 있어라.

흔들리는 것은

밤길과 눈물만이 아니라 너의

대낮을 행진하는 비수같은 어둠의

이 이웃, 이 거리.

정오

오포(午包)의 촉수(觸手) 끝에

독초처럼 반짝이는

한 점 앵혈(櫻血) 때문에

펄럭이는 것은

깃발의 할 일이 아니다. 이제

상처마다 숨을 밝히고

진한 외침 하나로 돌아오는

이 시대 최후의 아담을 기다리는 거다.

   어느 공화국

섬마다 도화지가 있다.

한줄기 붉은 바람이 지난 뒤

모두 그 색이 되었다.

모든 색은 죽어가고

오로지 붉은 그들만

살아있다 한다

골짜기마다

치렁치렁한 붉은 웃음

흔들림으로 피워내는 건

생명의 자 끝으로

산화되는 미소

한 차례 뿐인 흔들림 멈추면

미소도 색 바래고

낙조가 엎질러진 서녘하늘

섬마다 돌아오는

은빛 종소리

   새벽

한 타래 잠이 감기고

꿈은 육신의 관에 드러눕는다.

새벽에도 어쩌면 그리

많은 밤이 오고 저렇게

도회의 옥상으로 쌓여가는가.

문마다 터져 나온

지난 밤의 물결들이

가슴에 슬픔을 감고

빌딩의 계단을 오른 뒤

하루에도 몇 만이나 뛰어내린 죽음을

새벽 청소부는 쓸고 있는가.

한번만이라도 좋다.

꿈들이

도시의 새벽에 밤을 퍼내어

잠 깰 때마다 서성이는 슬픔들에게

다시 한번 언약의 여명을 켜서

벽처럼 일으켜 세우는

신새벽을 보고 싶다.

   우산 하나의 행복

우산 하나 쓰고

우산 만큼의 행복을 품고

촉촉히 길을 걸어 재취업 교육장에 간다

우산 하나의 공간

유일하게 몸을 감쌀

우산 하나의 삶으로

우산살만큼 야윈 뼈로

지금은 이 빗속을 지나가야 한다

그동안 허파에 든 바람의 색깔

우산 안에 피어나는 담배연기 만큼의

공간을 비집고 여기 아닌 데로

올라보려는 연기의 촉수

연기만큼의 몸뻗침

빗방울 동심원을 그리는 횡단보도

흰 사선 검은 보도블록 일어서

평탄하던 길이 언덕이 된다. 가파라진다.

우산 하나 쓰고 연기가 간다.   

   껍데기

껍데기 입고 윤이 나다

껍데기로 뒹구는 조국 땅  

비 맞는 쓰레기하치장에 찢긴 깃발로 서

오늘의 폭풍을 온몸으로 부딪친다

흰 드레스 팔랑이던 꿈도 오물 뭍고

경적 울리며 거리 찢던 자가용번호판과

희망이란 내일도 하치장에 부리고 떠나는 트럭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이제 없다

IMF청소반의 붉은 완장만이 피의 대가를

분주히 파헤치고 있을 뿐

누가 이 팔자 걸음에 돌부리를 심었나

그것은 중요치 않다

누가 한풀이 소비 질주에 호루라기를 불었나

그것도 중요치 않다

껍데기끼리 행복하면 그만인 껍데기 세상에

껍데기는 물러가란 구호도 중요치 않다

다만 한풀에 허물어질 껍데기 뿐이라도

껍데기끼리 부둥켜 살 수 있는

백지같은 믿음 한 포기라도 자라고 있었다면

조국의 산하는 검은 비 속에

이토록 통곡치 않았으리

불쌍한 껍데기 간다

비 맞으며 껍데기끼리 돌아앉아

트럭 타고 도살장 간다

   요즈음

요즈음은 자꾸 슬픔만 보여요

창가에 기댄 버스간에서도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사람들도

포장마차에 모여 앉은 등들도

투명한 내장의 슬픔만 보여요

속 들키고 체념한 생존만 보여요

그 생존도 헐값에 널어 논 고수부지

실에 매달린 허공의 연처럼

한없이 흔들리는 목숨만 보여요

목숨 밑에 칼춤 추는 바람만 보여요

참으로 한세상 발버둥치며 왔거늘

살아 남을 방법은 이 표정 뿐인가요

아직도 이 자세 뿐인가요

알듯 모를 듯 세월이 가고

산 듯 죽은 듯 이별이 이어지고

정거장마다 내려 딛는 사람들

구멍 난 가슴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가곤

다시 타지 않은 사람들

요즈음은 그 인연이 보여요

   비둘기떼                                

미원공장 옥상에 사는 비둘기

떼지어 허공을 헤매네

멀리는 날아볼 줄도 모르고

미원공장 옥상 먹이만 먹고 자란 비둘기떼

잿빛하늘 날아봐야 까만 점

하잘 것 없는 허공의 점

울음소리만 들리네

거리에도 울음 소리가 들리네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남루한 40대의 푸석한 발걸음

먼지 쌓인 정거장에서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서성이는 어깨들

거리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네

어깨가 허물어지고 있네

아이들 노는 놀이터를 바라보며

소외의 외다리를 건너는 중년

잘 가공된 모이만 먹다 거리로 밀린 40대

소주병 차고 산으로 간 아버지

소리없이 울으러 간 아버지들

꿈은, 건설은 끝났네

미원공장 옥상에 살던 비둘기

잿빛 먼지로 길가에 뒹구네.

   여권 갱신

어딘가로 떠나지는 일에도

정부의 허가를 겹겹이 넘어야 하기에

얼굴 박고 도장 찍고

두 손으로 내밀고 나서는 구청

이 땅 40년 세월만 박박 긴 걸

이 나라가 버린다.

이른 회색 빛 40대들

아픔 없는 사람 없어 비명하는 사람 없고

길거리마다 도장만 파고

그냥 떠나는 자들

구청 옥상

청아한 옥빛 댕기를 껴안고

하얗게 손젓는 태극기

하늘은, 떠나도 늘상 흔적없이 푸르러

멀어진 것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반짝여간 푸석한 얼굴들

도장 찍고

백지 한 장 남기고

떠날 것만을 허락해달라는

이 땅의 40대

   유물의 비극

돌아보면  나 죽는 날 다 놓고 갈 것들

책과 컴퓨터 오디오와 복사기

내 앉았던 의자를 바라보며

유물의 비극을 준비하게 될 것을

주인 잃은 침묵과

하루 하루 쌓여가는 먼지

창은 닫혀 호흡은 끊기고

저녁에 돌아와 밤을 지새곤 하던

한 인간의 빈자리만 식어가고 있을 뿐

이들과 살다 나 죽어가고

손때 묻힌 흔적마다 지문으로 피어나는

조용한 원망이 준비될 것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이 밟혀와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깨우지 못하고 돌아보는 방안

남는 자의 쓸쓸함이 먼지처럼 쌓이고

지상의 인연 때문에

몇 개의 무책임한 원망이 촛불을 밝힐 것을

   밤지기

밤을 기다렸습니다.

밤의 밑에서 눈감고 시를 써야 했습니다.

까만 가슴에 밤바람이 왔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기고

그림자 밑으로 걸어 깜깜한 우체통을 뒤져야 했습니다.

먼 들판에서 오는 울음소리 같은 밤공기 속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더 까맣고 반짝이는 슬픔들이

굴뚝을 빠져 나와 밤하늘로 돌아가는 시각

지구에 기대어 쏟아지는 별들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짙은 매연을 폐부 끝 창까지 밀어넣고

살아있다는 겨울 밤을 지켜야 했습니다.

몇몇은 깨어 꿈을 버리고

살수록 버거워지는 생존의 아침을 걱정하며

비릿한 인간의 쓴 술을 취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편지를 쓰다 덮어버린 뒤

불 꺼진 창 안을 채워주는 따뜻한 어둠

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깨를 깍지 끼고

이불처럼 어둠을 끌어 덮어야 했습니다.

차별도 없이 내리는 밤을 맞아 아껴뒀던 꿈은

지구의 가로등 밑을 배회해야 했습니다

차라리 어둠을 사랑했습니다

툰드라의 극광처럼 씁쓸한 웃음 번지는 밤

지쳐서, 그래 돌아와서, 쉬고 싶어하는 그렁그렁한 어둠을

취하도록 껴안아야 했습니다.

어둠의 머리맡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날의 슬픔을 지켜주는 밤만을 보듬고 있어야 했습니다.

지구 가까이 별빛 몇 개 그리움처럼 켜놓고

죽는 날까지 동면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산책

낙서같이 구겨진 길거리를

의식의 더듬이를 하늘거리며

생각의 반대쪽 얼굴로 걸어도

산다는 일은

어둠 문 하늘과 땅 위에 씁쓸히 무너져 있고

가슴엔 점화되지 못한 불씨만 모여

전혀 낯선 나와 또 다른 내가

암투로 붉어지고 있나니

파도처럼 일어서는 푸른 노래는

날마다 걸어봐도

땀 배인 육신을

벗고 나오지 못한다.

떠내려가는 세월을 바라보며,

섬이다.

떠나가는 표식 하나

한번으로 끝나는

나의.

   회색 겨울

좀더 파릇파릇한 죽음을 이루기 위해

내 이 밤 고졸한 침묵으로

바람 앞에 망연히 서있다

깨달은 듯 떠나는 잎과

가을이 숨져간 빈 거리에서       

기웃거리다가 스러지는 일과

매일반의 서성임

삶의 벼랑에서 소진해지는 욕망과

세월에 실려 간 사랑의 일로

이 계절의 바람은 바람이 아니러니

하룻밤 술집 영수증 톱니자국에 잘려간

내 하루의 비애가

전신주에 걸렸다가 어디론가 떠난 뒤

감전된 꿈들이 잠 속에서

검은 손을 휘적이며 흔들려

새벽 잠자리엔 숱한 땀들의 시체

이 누리에

진정한 사랑의 그림자 하나 없고

천지는 쓸쓸한 빈 가(家屋)

눈도 없는 회색 겨울

무질러질 듯 가련한

길섶의 삶들도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