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삶과의 대화

 

 

못

 

더운 방안 바람 한 줄기를 따라가 보면

선풍기 낑낑대는 벽을 보겠네

벽에 박힌 못 하나를 보겠네

 

흙 속에 돌 속에 핏줄 한 뼘

수만년 딱정이 진 뼈가

풀무질 단근질에 못 하나 되어

집 벽에 박혔네

 

허공에 내민 대가리에

커다란 선풍기 타고 앉아

머리를 돌리며 사투하는 동안

정녕 힘쓰고 있는 것은 그 못 한 개였던 걸

 

온 집안 선풍기처럼 시끄러운 그대를 위하여

바람이 되게 한 애들을 위하여

묵묵히 벽에 박힌 못 하나

가장은 없고 못 하나만

십자가처럼

오늘도 견디고 있네

 

 

 

나그넨 줄 알겠다

 

시와 오래 살다 보니

자연인이 되어간다

꽃과 노는 나비

물에 비친 나무

바람 타는 저 새

그들의 삶은 건드리지 않아도

오래 엿보다 보니

풀의 손길

빗방울을 알아보겠다

나비 되고 새도 되고

달빛 교신하는 하늘도 본다

모두 배울 스승이라

그림자도 안 밟을 일 알겠다

저 만치 바람과 노는 들꽃

먼저 가고 나중 가고

아무 일 없는데

울리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잘 사랑하는데

꽃 한 송이 피지 못한 내 안

나그넨 줄 알겠다

 

 

 

반달을 읽다

 

이젠 반만 보고

반만 듣고 멈출 일이다

사랑도 반만 하고

반만 추억하고 넣어둘 일이다

그렇게 반만 만나고

반만 헤어지고

반만 살 일이다

 

반쯤은 비워

살지만 말고 죽어도 보고

가지만 말고 돌아도 보고

뒤적뒤적 쓸데없이 배회하듯

이 나이에 이해 못 할 일이 어디 있으랴

용서 못 할 일이 어디 있으랴

원래 없던 일, 바람 자욱 누운

공동묘지도 가 볼 일이다

 

나무의 반은 뿌리였기에

사람의 반은 눈물이었기에

산다는 반은 어둠이었기에

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아 못 본 자리

이 나이에 닦아주지 못할 일 어디 있으랴

 

반을 채우기 위한

반승반속半僧半俗

달 같은 것을

 

 

 

사는 기도

 

그립게 살면 소리가 나고

비우고 살면 날 수 있어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새가 될 수 있다 했지요

 

아프게 살면 하늘이 가깝고

보고픔이 많으면 꽃이 되고

간절하게 살면 별이 된다 했지요

 

오늘도 새와 꽃과 별을 봅니다

흠모의 촛불을 켜고 길을 가지만

널려진 나날은 부끄럽게

여러 날 겨울

겨자씨만한 돌 하나

모래 한 알만 하겠는지요

 

바람은 결국 바람으로 가는 것이라죠

모두 둘둘 말아 내려놓고

세사의 잔파도 시비하지 않는

바위나 되어 살게 해달라고

돌의 묵언으로 살게 해달라고

손뼈를 세워 봅니다

 

 

 

내리고 싶다

 

내가 하나가 아니다

내 안에 나 있고 또 나 있다

고집불통 나가 비를 맞고 오고

새침데기 나가 토라져 있다

한 몸인데 외로움의 칡넝쿨이 땅을 파고

그리움의 능소화가 담을 넘는다

 

처음 온 길을

변변한 약 한 첩 없이 걷는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등을 토닥여 준다

괜찮다고 쉬엄쉬엄 가라고 한다

모두가 나

몸된 자의 고뇌가 있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다

번잡한 내 안의 저자거리에서

모두 어루만질 천수관음 같은 밝은 손길로

나 하나 밝혀주지 못 한 하루는

뛰어 내리고 싶다

 

 

 

갑의 횡포

 

내 태생이 을

을의 교육 이십 년

갑이 내민 계약서 을 란에 도장만 찍던

갑을 모르고 불만도 모르고

그냥 고맙다며 산 평생

아버지 같이 아버지 같이

 

내게도 갑이 있어 집에서나

술 먹으면 나타나 말하곤 했지

뒷골목을 비척이며 말하곤 했지

비키라고 비켜달라고

이게 겨우 갑 질이었지

 

갑에게도 을

갑인 척하는 을에게도 을

을끼리 편한 을의 길 따라

굵어진 다리 끌고 넘어온 풀 다리

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다음 생에선 갑으로 나

지금처럼 살면 복 받을까

지금 맘으로 걸으면 행복할까

다음 생으로 이 생 엎고 갈까 몰라

잠들 수가 없다

 

 

 

동행 길

 

그림자 없는 인생을 본 적이 없다

같이 입고 먹고 자다

저승길까지 같이 할 조용한 친구

그래서 보고파 가로등 바깥쪽에 앉아 기다린다

어딜 다녀오는지

얇게 엎드린 새까만 육신으로

어둠을 모으는 반려자

땅바닥을 기어와 내게 매달린다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는 것은

사는 짐 때문이라는데

어둡지 않은 내 그림자를 본 적이 없다

날마다 깜깜했다 그 선을 넘지 못하고

나이테에 스며 온 것도 어둠이었다

그림자가 힘들었던 건 나 때문임을 안다

 

같은 나이 같은 이름의

잠자지 않는 족속을 달고

저문 그림자로 가는 길

외로운 자 끼리는 색깔을 드러내지 않는 법

그림자를 찾고부터 외롭지 않다

 

 

 

우산 속 행복

 

사람 산다는 게

우산 하나 쓰고 가는 거다

우산살만큼의 집을 짓고

우산살만큼의 비를 맞으며

우산 안 만큼의 행복을 살아가는 거다

가끔 우산을 접고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인사를 나누고

다시 우산을 쓰고 집에 가고

그때마다 우산 하나 넓이의 행복이

우산 하나의 그리움이

손잡이 되어 버티는 거다

우산에 인쇄된 이름이 바랠 때까지

혼자 펼치고 가는 것이다

오늘도 우산살을 밀어 올리며

또 하루를 밀어 올리며

빗속으로 내딛을 때

우산 하나가 있는 한

아프지 않다 어떤 물기도

 

 

 

공부

           -회한 悔恨

 

낙엽에서 떠날 때를 배우고

찬 눈에서 청정을 배웠으며

강물에서 순응을 배웠고

산에서 묵언을 배웠다

 

별에게서 그리움을 받았고

하늘에서 무서움을 깨우쳤으며

흙에서 죽음을 알았다

 

이 몸 가르친 건 모두 자연

스승은 저 들과 그 너머에서

늘 지켜보고 계셨다

성주괴공¹하기를 무량겁²을 할 동안

현생까지 한 몸이었다

 

눈빛만 돌려도 모두 가르침인 걸

짧은 노력과 우매한 몸 하나

늙도록 까맣다가 이별 가까워 손 떤다

 

한 생을 살았으나 산 것이 없고

한 생을 익혔으나 자란 게 없으니

내 별에 못 돌아가겠네

이승에 그리움 하나로 남네

 

1,성주괴공 [成住壞空]

세계가 성립되는 지극히 긴 기간인 성겁(成劫), 머무르는 기간인 주겁(住劫),

파괴되어 가는 기간인 괴겁(壞劫), 파괴되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기간인 공겁(空劫)을 말함.

2.無量劫 [ 무량겁 ]

끝이 없는 시간(時間) 1겁을 겁파(劫波)라고도 한다. 세계가 성립되어 존속하고

파괴되어 공무(空無)가 되는 하나하나의 시기를 말하며, 측정할 수 없는 시간, 즉

몇 억 만 년이나 되는 극대한 시간의 한계를 가리킨다.

힌두교에서 1겁파는 86억 4천만년이다.

그 길이를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약 15 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낸다. 이렇게 겨자씨 전부를 다 꺼내어도 1겁은 끝나지 않는다.

또, 사방이 1유순이나 되는 큰 반석(盤石)을 100년마다 한 번씩 흰 천으로 닦는다.

그렇게 해서 그 돌이 다 마멸되어도 1겁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1겁이 무량하게 이어진 기간.

 

 

 

광화문을 지키는 시인들

 

광화문에 오면 시가 있네

목조 계단을 올라오는 젊은 시

쉬었다 올라오는 중년 시

20년 된 현수막을 포장마차처럼 걸고

한 달 살다온 생활 차로 마시네

찻김에 서리는

못 온 시와 스쳐간 시와 아득한 시 얘기

말없어도 묻어있는 2층 목조카페 있네

작은 손 마이크 소리면 넉넉한 공간에

잔잔히 때론 뜨겁게 시가 울리면

풀내음 흠흠 젖내음 흠흠

지하철 손잡이처럼 한 방향으로

쏠리며 떨며 젖어보는 마음

시를 마시며 시를 뒤적여 구으며

다 내려놓고 시로 말하는 선남시 선녀시

이 시대의 그리움을 사랑하며

시의 만세를 실천하는 시들끼리 모인

광화문 <나무 카페>

사랑방 시낭송회

 

 

 

난파선 가족

 

대창이 하얗게 날아와 꽂히는 장맛비

아파트 한 채가 출항한다

각자 홀로 앉은 선실에 깜빡이는 전구

피복이 벗겨진 전선에 바람이 스치면

회로를 멈췄다 잇는 생각들

 

마음이 꺼지면 분명 쓸려갈 것이다

세상의 낭떠러지에서 삼켜질 것이다

물속에서 파도 속에서

신종생각과 신종해석이 부딪치고

더 많은 벼랑의 살이 무너질 것이다

 

감전도 자주하면 만성이 되듯

가족의 피복이 벗겨진 틈으로 스미는 빗물 정도야

스파크 튀는 누전 정도야

무시해도 안 될 일 없는 세상

 

그러나 평생 밖은 언제나 폭풍

돛대 꼭대기가 찢겨져 나가는 비에

가정이 찢겨져 나가는 다음 폭우에

난파 된 SOS가 기도를 띄우고

각 방의 화면은 잠재우고 소리만 모은다

 

 

 

달고나의 추억

 

무얼 알고 키웠데요

풀처녀 흙총각

새끼 몰래 어미 되어

꿈마저 엎지르고

빠지며 삼키며 건넜던 평생

 

무얼 알고 컸데요

달고나의 별이나 알고

침 바르며 깨뜨리며

설탕별이라도 따보려고

울지 못한 어린 깜냥

 

수제비나 뜨며

무얼 알고 사셨대요

리어카나 끌며

어찌 다 듣고 사셨대요

 

아카시아로 꽃 배 불리던 오월

봄날은 다 무너지고

졸업짜장 세 그릇에 이 키가 되었지만

더 살아도 키는 늘 삶처럼 그랬던 걸요

 

 

 

연탄 위 끓고 있는

한 국자 안의 노란 설탕

그 식구 품고 녹아

평생 침 바르며 조심조심 따낸

설탕별 한 개로 남은 사람들

 

 

 

선인장

 

아버지는 가지 많은 꽃나무로 살지

잔가지마다 찾는 꽃과 열매

계절 맞춰 열고 떨어뜨리고

올망졸망 싹 크는 재미로 살지

동고비 들르고 다람쥐 올라와 재롱떠는

아침이나 저녁도 맞이하지

 

왜 고집만 굵어져 가시로 온몸 덮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의 선인장 됐나 몰라

멕시코선인장처럼 살았는지 몰라

 

아버지에게도 분노의 형식과 내용이 있어

잔가지 잎을 가장한 독성열매나

시퍼런 잎사귀마다 갉아 먹히는 배반은

견딜 수가 없었는지 몰라

 

어떤 말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꽉 다물고 기억만 쌓다가 가시 하나 자라고

사는 외로움 떨기만하다 가시 둘 돋고

온몸의 상처마다 가시가 맺혀 그리 됐겠지

 

가시자리엔 또 가시가 나는 법

겨우 물 한 통 몸에 담고

눈물 한통 몸에 심고

큰소리는 곧 잠들겠지만

가시 속의 상처가

가시 속의 눈물이 다 낫기 전에

사막을 빠져나오진 않을 거야

 

사막으로 나간 가시덩어리

가장 뜨거운 태양을 마주하고

평생 이슬만 받아먹고

이슬처럼 사는 아버지

 

 

 

양은냄비 추억에 끓다

 

남비가 표준어인 것을 손사래 치는 냄비를 안다

하루 한번 판잣집에 드는 햇볕만큼

끼니도 그러했던 빛바랜 시절

우리 집 양은냄비는

입술을 달싹이며 뜨거운 눈물로 생활을 끓여내다

늘상 꺼멓게 탔다

 

냄비는 어머니처럼 울었다

세상이 온통 시루떡 같은 눈인데 배고프던 그 겨울

신 김치 한 포기의 뼈와 살을 우려내며

푹푹 한숨을 뿜다가 담을 넘던

붉은 고춧가루 눈물

세상이 맵고 추위가 맵고 울음이 매워

불꽃에 걸터앉아

사는 게 이게 아니라며

들썩이던 냄비의 엉덩이를

 

냄비는 아버지를 닮았다

리어카를 부리고 둘러앉은 막걸리 잔에

누구랄 것도 없이 숟가락 젓가락이

난타하던 타향살이 장단을

달동네 높은 음 노래 따라

보름달처럼 젖어오던 향수까지

온몸으로 막아내던 찌그러진 생활을

 

냄비는 나를 안다

대학 내내 동거했던 냄비에

유일한 라면을 깊숙이 넣을 때마다

양파 같은 꿈들이 냄비의 하늘로 부풀어 오르다가

겹겹이 풀어져 심해로 자맥질하고

동정 같은 눈물도 따라와 함께 끓었다

산다는 미로가 면발처럼 꼬일 때마다

발버둥치는 라면 발을 죽일 때마다

문고 책을 읽으며 시를 먹었다

 

구멍 난 일상을 땜질하던 담 밑의 아버지도

그을린 냄비의 영혼과 함께 하늘에 사시고

개밥그릇을 면한 남겨진 냄비가

이승의 담 밑에서 오늘의 순두부찌개를

대를 이어 끓이고 있을 뿐이다

 

 

 

이 땅 위에

 

그 분은 돌아가셨다

새로운 사람을 보내주지

아니요 그 분으로 돌려주세요

늙었어도 해소기침을 해도 좋아요

지하에 놓지 마시고 땅 위로 주세요

 

무엇이 좋은지 포토샵에 펴진 주름

새하얀 연미복 신랑처럼 환한 디지털 영정

무릎을 꿇지 않고 국화꽃을 던지는

상조보험 주관 장례식장을 나오며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았다 이벤트로 고객을 맞고

부조함을 지키는 경비 상주 옆을 지나며

빵틀에 찍힌 1호 고인, 2호---24호고인

컨베이어를 흐르는 중저가의 죽음을 본다

찜통 여름 청결하고 쾌적한 첨단식장엔

땀 한 방울 나올 빈틈없으니

눈물을 대신할 습기조차 없다

골프, 주식 정보에 왁자지껄한 국화들

로비는 오지 않는 큰 이름표 단 친구들 쇼룸장

영정만 인생을 생각할 뿐

번호가 살다 가는 번호표

영업용 죽음 앞에서 이제 어떤 죽음이

자식의 눈물 한 번 빼줄까

 

그 분은 돌아가셨다

새로운 사람을 보내주지

아니요 보내지 마세요

이 땅 위에 아무도 보내지 마세요

 

 

 

울릉도 안부

 

남쪽나라 섬에서

내 집 문 안으로 뛰어 든 택배 박스엔

파도를 묻히고 온 배추 무김치

섬 꼭대기 해의 살을 물고 핀 달래 냉이

바다를 헤치고 뭍에 오른 다시마가

푸득푸득 해풍으로 피어나

한올 한올 누님의 얼굴 그리고 있네

 

바다로 열린 섬집 부엌 새벽을

똑똑 똑똑똑 도마소리로 잘라내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시보다 더 깊은

중년여인의

은은한 정의 맛을 빚었네

 

버무리는 손가락 새로 빠지는

빨간 고춧가루 청춘의 맛

새우젓 속의 새우 파드득 꼬리 털며

뭍으로 바다로 휘젓던 역마살 맛

바다바닥 쑥 뽑아 올린 다시마

은근설근 끓여 낸 푸르른 맛에

오묘한 연륜의 맛 비벼 넣어

그 향까지 절묘한데

콱, 한 입 가득 씹히는 그리움

 

 

 

간 볼 일

 

외롭냐

네 안에 네가 많지 않구나

어우러질 근기를 안 키웠구나

부처도 한 분 모셔놓고

마호메트도 모셔 장기도 두자면

노자나 장자도 기웃거리지 않더냐

선원도 충입하며 가끔 문안인사 드리면

외로울 짬 없느니

자꾸 자꾸 뵐 일이다

고전 몇 권 들고 늙은 벤치 찾아

풀 끌어안고 숲 베고 졸다 보면

웬만한 도인들 많이 지나가니

한 수 물어도 보고 선문답도 하다 보면

동서양화 인물 다 깨어 움직이면

외로울 짬 없다

인간 세상도 짭쪼롬한 게

맛보고 간 볼 일이 엄청 많다

 

 

 

눈물 맛

 

나는 너의 눈물이다

네 손이 벽을 짚고 울 때

함께 울던 눈물이다

네 손이 가정을 짚고

세상을 짚고 울 때

함께 했던 눈물이다

네 가장 뜨거운 것 중

첫 한 방울이었으며

녹아서 흐른 마지막 길이었다

순간을 태어났다 가지만

그 순간은 인간 중 가장 인간적이어서

몸도 들어올린다

전체를 들어올린다

나는 너의 눈물이 아니길 바랐지만

이미 먼 길을 왔고

어쩔 수 없이 만나곤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슬픔이 아니라

환희거나 감격이길 빈다

눈물도 결이 길면

짠맛에서 단맛도 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