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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음 꽃 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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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봄인데

실직을 앓으며

생활의 나무 아래

시집 속의 햇볕을 줍네

 

봄은 오는데

녹색 잎은 열리는데

마음의 별까지 잃어버려

홀로 딛는 길에

적막한 잡초

 

세상은 봄인데

거짓말 같은데

 

골고루 흩뿌려진 하루를 받아

어이한데요

어이한데요

태생이 풀인데

하늘 아래 온통 풀인데

 

탈고가 끝나지 않은 생을

잠시 부칠 곳 없는 봉투에 넣으며

침으로 봉하네

 

 

 

신용대출

 

얼굴도 본 적 없는데

신용을 보증해 준다는 보험료를 내고

돈을 빌린다

 

인두겁을 썼기에

교회와 절에 가서

인간으로 신용을 보증해 준다는

하나님 부처님의 법을 빌려온다

 

인간을 지킬지 모르겠는데

담보도 대지 못하는데

신용이라는 이름의 담보가 자꾸

이승과 저승에 쌓이고 있다

 

나무도 꽃도 하늘도 대출받아

마당과 산 위에 둘러놓고

대출해온 마누라와 애들 함께

순두부찌개를 끓이는 저녁

 

끼니를 꾸어오듯

삶을 신용대출받아

갚을 길 없는 눈물의 하루를 떠먹는다

 

 

 

꽃 보듯

 

피었구나

예쁘게 피었구나

사는구나

예쁘게 사는구나

 

구름 없는 산을 덮고

들판을 넘고

이 꽃 저 꽃도 아닌

너만의 꽃으로 피어

그 이름의 꽃빛 흔드는구나

 

구름 없는 초가를 덮고

빌딩을 넘고

저 사람 그 사람도 아닌

너만의 사랑을 짓고

너만의 향을 나누고 있구나

 

그대로 꽃이구나

 

 

 

봄 밤

 

밤이 쌓이는 벤치에 앉네

달빛 세상 모여 차분한데

풀벌레 스치는 소리에

인기척인 줄 둘러보니

풀잎마다 달빛 조각 반짝이는 밤

풀끝 흔들 때마다 피는 반딧불꽃

달빛 숨소리 속에

풀은 풀이라서 흔들리고

바람은 바람이므로 지나가는데

흔들리되 아픔을 모르고

지나가되 자욱을 남기지 않네

다만 바라보는 삼경의 사람이 있을 뿐

이 찰나

바람과 나와 풀로 있으면 되는 것

아무런 간섭이 없네

달도 내려와 옆에 앉네

봄 밤

 

 

 

한옥 향

 

한옥은 때가 중요해

기둥엔 손때

천정엔 아궁이때

대들보 나이테 무늬에

이 집의 나이 때까지 스민

짙은 암갈색 향

추억이라고 말해도 좋고

애환이라고 말해도 좋은데

달빛도 부서졌다 갔고

바람도 쓸어보고 갔고

겨울 아궁이 매운 연기로 훈제도 돼야

그 무늬 나오지

사람도 그 묵기 쯤 돼야

한옥향이 나지

 

 

 

늙은 벤치

 

뒷산으로 뻗은 길섶에

덧칠이 벗겨져 속결까지 삭았고

한 토막 이빨 덧댄 나무벤치 홀로네

 

작은 풀밭 지나 숲 건너보며

들꽃 흔들림 나비 왔다가는 길

뉘도 못할 기다림 다 거쳐

세월로 닦고 문지른 나이테

맑은 원목향이 나네

 

오랜 세월 경도 들려주고

시도 보여주고

담배도 많이 피워

비 조금만 와도 쉽게 눈물 젖네

 

평생 하나의 의자가 되어

길 가는 나그네 쉬게 하고

길 가는 한숨 한탄 쉬게 하고

찾아온 비와 눈, 달빛 앉았다 가니

등 기댔다 떠난 중생을 읽겠네

흘러가는 하늘 마음도 들을 줄 알겠네

 

 

 

숲 속 독서

 

초록 강물 뿌린 숲

사각모 정자에 책 읽는 노인

까치는 풀을 쪼고

나비는 꽃 이랑 물결 가네

무슨 구절인가

다리 올려 땅을 차고

인생에 줄 긋듯 먼 산도 보네

다음 글이 궁금한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고

오동잎도 따라 갈피를 넘겨가는데

가부좌 당기며 읽다가

벌렁 누워서 보네

어디서 새소리 추임새 던지니

나뭇가지도 정자로 자꾸 기우는데

성현의 글귀 잎사귀 그늘마다 뵐 듯 하고

계곡물 청아한 목소리 끊지 않고 읽어 주니

까치는 나무 등걸에 올라

먼 숲을 지긋이 보다

정자 위에 와 고개를 끄덕이네

온 숲에 책 있네

 

 

 

별 일 있다

 

작은 흰 꽃 자욱한 풀밭에

하얀 나비 팔랑

이 꽃 저 꽃 팔랑팔랑

의심하는 사랑도

생활의 애환도

이 풀밭엔 별 일 아니다

인적 없는 정자 보도블록

이끼 퍼진 작은

융단초원 끝없다

풀도 못 된 것들도

장마 한 짬 동안

지상 낙원을 지었다

이곳에도 하늘은 똑같이 넓어

별 일이 없다

별 일 있는 건 내 안의 나

들꽃도 이끼도 못 기른

내 안

풀밭 한 평 없다

나비 하나 없다

 

 

 

젖은 행복

 

우산 하나만 있어도

이 부끄러운 날을 가릴 수 있기에

우산살만큼의 집에서

큰길의 비를 바라본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우산대에 전해지는

끊이지 않는 생활의 타격음

가끔 천둥 번개 치는 소리

우산이 막아주는 세상은

고마웠다

젖지 않아도 걸어온 날들의 습기가

오늘에 가득하지만

부러진 살에 테이프를 감으며 이어온 길은

고마웠다

우산 하나 쓰고 산 밑에 앉아

큰길의 비를 바라보며

그동안 내 눈이 흘려온

물기 묻은 행복을 털어준다

행복도 눈물을 흘린다

 

 

 

벌초

 

풀 무덤 두 봉우리

풀내음 흠흠

풀 베니 풀 비린내

젖내음 흠흠

 

무덤 속 사시는 분

-쉬엄쉬엄 하렴

-쉬엄쉬엄 살렴

산집에 사는 아버지

풀집에 사는 어머니

 

마실 온 동네 바람

산새 수다 내려놓고

자식들 발걸음 소리 두런거림에

풀끝만 흔드시네

 

낫 놓고 절 올리니

풀 끝 나비 한 쌍

날개 박수 치는데

묘 깊은 데서 피어오르는

뿌리의 굴곡 향

 

 

 

낚시터 백로

 

한 다리로만 서 머언 목을 빼고

하얀 그리움 긴

백로

 

비늘 지는 물낯 봄바람

켜켜이 북극 떠난

백학의 얘길

펼쳐내고

 

수채화 같은 낚시꾼

밀짚 속에 고갤 묻고

보이는 듯 물 속 깊은

생각을 긷고 있다.

 

 

 

물 같으랴

 

물은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고

한없이 그리우면서 없듯 출렁이네

형언할 몸부림의 길이 없고 상대할 깊이도 없네

끝 모르게 이어와 볼 새 모르게 떠나가니

물 따라 가면 나마저 스밀 수 있는

바다 있어

울음 없고 소리도 아닌 새떼로 우네

날마다 수평선 언덕에 올라 언덕을 버리고

나를 만나 나에서 내리네

끊어지지 않는 저 물 속에

두고 온 고요의 강은 흐르니

나라고 할 것 없는 물방울

한 생을 굴러 소리 없는 새 되어

외진 암벽에 올라 바람을 털고 있네

 

 

 

연꽃 생각 자리

 

외로운가

외로울 때 들림이 있고

외로울 때 사람 귀한 걸 안다는데

혼자인가

혼자일 때 풀, 나무도 보이고

메뚜기, 동구비도 어여뻐진다는데

생각이 싫은가

생각 끊어진 자리

너 나를 잊은 자리

땡볕 운동장에 뛰노는 햇살 같은

내 안을 허물면

물낯에 어른대는 물그림자 같을까

외로울 때 진리가 온다는데

정말 생각이 싫으면

진리가 온다는데

절집

물 위의 꽃방석 하나

 

 

 

이연異緣

 

인연이 너무 많다

눈에 너무 많이 담았다

허공 한번 보지 못한 채

내 안의 시냇물 길어 올리지 못한 채

인연만 부풀리다 엉클어졌다

 

번잡한 물소리 너무 들어왔다

나를 묻혀 논 거리와 골목이 너무 길다

너무 많은 사랑과 인사했던

큰길을 벗어나 내 방으로 가야한다

고요를 마주하고 앉아

하나하나 버려야한다

 

사랑했던 물건 하나 사람 하나

인연 있던 관계 하나 거리 하나

각질을 벗어내듯

연꽃잎을 떼어내듯

비우고 지워 비움마저 지워질 때

이마가 맑은 나 하나 만나질까

 

 

 

그저 나일뿐

 

세상은 온통 꽃인데

가을 속인데

 

어제는 모두 흘러간 것이라고

이연異緣은 쌓이기만 하는데

 

단풍 붉었던 맘

훠이훠이 허공 돌며

 

시린 얼굴 고운 기억

온몸으로 지우는데

 

아픔도 색깔이 있다고

꽃도 아닌 것이

꽃 되어 세상은 덮이는데

 

세상은 꽃무덤 지는

오체투지

산마루 넘으며

절하는 이

 

그저 나일뿐

 

 

 

눈 맛

 

어느 한 때

아낙의 밥솥 김이었을지도

누구의 눈물이었을지도

몇 만 년 전 빙하였을지도 모를

함박눈을 받아 먹어본다

 

어느 머언 섬 맛이 나기도

사막의 샘물 맛이 나기도

은하 건너 별 맛이 나기도 하니

그가 지나온 만만치 않은 길을 알겠다

 

어느 설레는 첫 만남의 향이

멀리 두고 젖어버린

그리움의 향이 나는 걸 보니

차마 만만치 않은 인연을 알겠다

 

지구의 외진 겨울 한 송이 눈에서

사람의 길과 향을 혀로 맛보다

시간보다 멀고 허공보다 깊은

우주를 껴안을 뻔 했다

 

다음 빅뱅의 순간까지

걸어야 할 앞길에도

고요하고 넉넉하게

눈은 내리고 내릴 것이다

 

눈이 돌아온 길이 슬픔이었다고 해도

슬픔의 갈 길이 겨울이라고 해도

 

 

 

노인정 안내양

 

이제는 뭐든지 다하려고 하지 마셔야 돼요

이제는 누구든 너무 자주 만나지 마세요

이별도 걱정도 말도 생각도

돈벌이도 듣고 보기도 줄이세요

그렇게 모자라게 헐렁하게 살아가세요

부러질 일 없이 찰랑 휘다 돌아오고

깨질 일도 없게 구르다 멈추세요

남의 밭은 돌아서 가고

절구 방아질로 뼈 없이 말랑해진 인절미나

허공을 담은 공기떡처럼

폭신폭신 녹녹해지셔야 해요

그저 그런 무미한 맛의 옛사람으로

얌전히 지하철을 타고 이어폰을 끼세요

눈 감고 경을 들으며

담 밑의 들꽃처럼 창 너머 삼등성처럼 그냥 가세요

바람결에 다만 흔들릴 뿐

뭐든지 다하려고 하지 마셔야 해요

그리움은 가끔 뒤적거려도 되고요

추억은 가끔 안경 벗고 보셔도 돼요

그렇게 시처럼 풍경처럼 머물다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