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詩
구준회 세 번째 시집
우산 하나 쓰고 산 밑에 앉아
큰길의 비를 바라보며
그동안 내 눈이 흘려온
물기 뭍은 행복을 털어준다
행복도 눈물을 흘린다.
序詩
기다린다
시를 기다린다
그리움을 기다린다
벤치에 앉아 계단으로 올라오는
하얀 별무리를 떠올리며
기다림의 생각 길을 따라 간다
생각은 서있다 쪼그렸다 멈추고
먼 곳을 다녀도 온다
길게 기다린다
슬픔도 함께 기다린다
눈물도 데려온다
풀벌레 눈물 깜빡이며
빗 속 물 위에 흘러가는 등불 하나
골목 끝 외등 밑을 지켰다가
건드리는 것들, 꿈틀거리는 것들을 본다
오래 눈 내리는 벌판을 바라본다
더 오래 기다린다
마음까지 기다린다
그리움의 한나절과 일상들
그리움의 사계에 날아가는 나비들
내 안을 열고 바로 본다
내 마음 빅뱅의 순간까지
시를 기다린다
내 하늘에 별을 캔다
2015년 북한산 자락에서
제1부 따뜻한 세상
드럼세탁기 15
보도블록 16
자살한 컴퓨터 17
시계의 눈물 18
요즘 내 직업 19
만추 20
겨울나무 22
학교 수위실 난로 24
새벽 지하철 25
긴 배웅 26
꽃 화석 27
손잡이 28
제2부 마음 꽃 심기
잡초 31
대출 32
꽃 보듯 33
봄밤 34
한옥 향 35
늙은 벤치 36
숲 속 독서 37
별 일 있다 38
젖은 행복 39
벌초 40
낚시터 백로 41
물 같으랴 42
연꽃 생각자리 43
이연 44
그저 나일뿐 45
눈 맛 46
노인정 안내양 48
제3부 행복한 사람
이게 어디여 50
핸드폰 배달 52
동요작사가 53
노래 만나는 길 54
까치밥 55
하얀 클로버 56
홍매화 피던 날 57
천사의 나팔꽃 58
지는 걸 몰랐네 59
별 일 아닐 텐데 60
시 암탉의 꿈 61
문제없다 62
암 껏도 아니다 63
남으로 가겠소 64
양재천을 걸어보세요 65
지구에서 살기 66
제4부 끝나지 않은 그리움
시는 써진다 69
입김 70
내 안의 달 71
쉬운 이별에 대한 어려운 사랑 72
연리지 나무 73
그랬더라면 74
그러려니 76
동양란 77
양파 뿌리 78
달무리 79
재회의 의문 80
당신을 보내고 1 81
당신을 보내고 2 85
당신을 보내고 3 89
겨울이 오니 90
바람 5 91
청풍호 92
관악산 93
가지고 있는 한 94
창문과의 대화 95
다음 생으로 가져갈 꿈 97
제5부 삶과의 대화
못 100
나그넨 줄 알겠다 101
반달을 읽다 102
사는 기도 104
내리고 싶다 105
갑의 횡포 106
동행길 108
우산 속 행복 109
공부 110
광화문을 지키는 시인들 112
난파선 가족 113
달고나의 추억 114
선인장 116
양은냄비 추억에 끓다 118
이 땅 위에 120
울릉도 안부 122
간 볼 일 124
눈물 맛 125
1 따뜻한 세상
드럼세탁기
우리가 언제 한번 빨래가 돼 본 적 있나
한 물속에서 팔 다리 얼싸안고 돌아본 적 있나
젖을 대로 젖어 풍차 타고 빙빙 엉켜본 적 있나
저 속에서 부부가 돼 보는 순간
풍요의 빗줄기 맞으며
앞뒤로 솜거품 물고 도는 시간
몸도 섞이고 말도 섞이고 영혼도 섞여 도는
열락悅樂의 땅에 가본 적 있나
너와 내가 뽀송뽀송해지는 순간까지
탈수되어 본 적 있나
서로의 불신과 원망의 때 쏙 빼고
얼싸안고 몇 바탕 바꿔 끌어안고
자꾸 비비며 다독이며 엉킨 데 풀어주는 곳
돌아가는 세상에 모두 맡기고
세게 한 번 느리게 한 번 돌아보는 곳
그리하여 모든 나의 고집을 빼고
아만我慢을 빼고 탈수 되게
한 번은 세게 한 번은 느리게
아무리 휘둘려도 끝내는 만나는
크게 휘둘릴수록 마침내 하나 되는
우리가 언제 한번 빨래가 돼 본 적 있나
빨래의 눈물이 돼 본 적이 있나
보도블록
밟혀보면 알겠더라
보도블록처럼 단단해야 하는 줄을
짓밟혀도 채여도 아픔이 없어야 하는 줄을
눈 오면 눈 덮고 비 오면 비 맞고
차가워도 흐르는 세월을 빚는 것을
최후의 소망까지도 밟혀보면
체념도 쉬이 다녀가지 않더냐
가끔 깨진 보도블록 만나
어떤 슬픔은 몸도 깨트리지만
금간 보도블록의 눈물을 읽다가
스스로 금 가는 가슴이 있거든
그 눈물 묻지 말아라
밟혀보면 안다
보도블록에 누워 하늘을 본 이는 안다
머나먼 별까지 밟고 밟히며 가야하는 길
너에게 나에게 보도블록이었던 이들
그 길이 은하수였음을
밟혀보면 밟혀보면 안다
자살한 컴퓨터
컴퓨터가 자살했다
언제까지나 살자더니 먼지가 향불로 피고
실망한 이유들이 흰 물음표를 입고
허공을 맴돈다
사운드 카드는 소문을 끓이다 식어갔고
하드디스크는 철묘비가 됐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던 사람, 사람, 사람들
너무 뜨거운 피를 쏟으며 쓰러져간 동물들
너무 아프게 죽어간 영혼들의 한을
다 쓸어 품고 영정이 된 컴퓨터 화면
멀쩡할 수 없었나 보다
저 밖의 그 많은 총질과 칼질과 사기를
그래픽 글씨로 영상으로 밤낮 뱉어내더니
누구의 손끝이 박음질한 시 한 편
바탕화면에 키우며 우울해하다
끝내 멈췄다
나도 살고 있는데
인간보다 충분히 불행했나 보다
그 짓 그만 던지고 싶었나 보다
컴퓨터가 자살한 날 종일
아무 불행도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손수 세상을 만나러 나간다
시계의 눈물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계
끝내 멈췄다
삐꺽이던 관절, 아슬아슬했던 태엽
너무 먼 길 담아 골병든 육신
대접 받던 시절 다 지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서랍 속
숨죽여 노년을 보내더니
멈춘 채 발견된 시계
얼마나 오래 전에 죽었는지
피부는 광택을 잃은 지 오래고
두 팔은 끝난 목숨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
시계를 땅에 묻으며
시계의 눈물을 닦아 준다
이 눈물의 구 할은 내 짐이다
채칵채칵 어느 순간을 말하는지
눈 빼놓고 혀 빼놓고 염통 빼놓고
목놀림 붉은 초침처럼 달려온 길
철렁철렁 어느 마음을 내딛고 왔는지
마냥 참으며, 비켜두고, 지나쳐 온
눈동자, 목소리, 살 아픈 갈대 둥지
찰칵찰칵 기억의 초침소리에서
이젠 괜찮다 미소가 번질 때까지
땅에 앉아 시계의 눈물을 닦고 또 닦는다
요즘 내 직업
요즈음 무슨 일하냐고 물으면
장례 일을 해요 조심스레 답한다
마음에 검은 리본을 달고
방마다 조등弔燈을 환히 밝힌다
타살된 시계의 몸을 닦아주고
자살한 컴퓨터를 묻어주고
책꽂이를 뒤져 찢기거나 이미 죽은 책을 태운다
옛 편지와 일기를 마지막으로 읽어주고
묵념을 한 뒤 화장 일정을 잡는다
한 때는 저리듯 귀한 것들도
아껴 마저 못한 말이나 인연도
오동나무관에 이젠 못질을 해야 하기에
너무 무거웠던 지난날에
흰 장갑을 끼고 성호를 그은 뒤
흰 삽을 떠 나간다
고인을 그렇게 보내드리는 것이
함께 살아온 내 할 일
어디 가서 다시 손을 잡고 웃을까
흰 장갑으로 쓰다듬어주는 시간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하얀 시간
누구든 마지막 할 일은
엷은 미소의 장례사인 걸
만추
외롭다고 전화하지 마라
외롭다고 문자 보내지 마라
길을 묻는 만년晩年의 발을 덮으며
승복처럼 깔리는 수북한 침묵
은행잎이 내리면
가을은 혼자 왔다 홀로 가는 거다
외롭다고 말 많이 하지 마라
하늘의 어디에 말이 있더냐
허공의 어디가 내 것이었으며
내 잎 내 가을이 있었나
아무 것도 놓고 가는 것 없다
모든 걸 비워낸
눈 시리게 깊은 하늘을 닮아
나마저 털어내는 가지의 길
하늘이 알아야 할
숲이 알아야 할
아무런 나 없어
그들도 그냥 바라보다 가지 않더냐
외롭다고 몰려다니지 마라
하늘도 혼자다
오직 이름 없이 나 하나로
이제껏 혼자 이어왔듯
만국기 휘날리는 가을 안으로
천천히 걸을 뿐이다
겨울나무
낙엽이 지며 할 말 다하고 가지 않고
나무도 외롭다고 붙잡지 않듯이
이별은 조용히 섭섭하게만 할 일이다
낙엽이 떠나도
뿌리에 모여 겨우내 이불도 되어주고
눈雪물도 머금었다 내주지 않더냐
함께 있는 사랑도 많이 좋지만
헤어져도 다시 그리워
더 진한 사랑도 올라오나니
겨울나무 서있거든 그 아래 낙엽
밟을 일 아니다
수없이 잎이 지고 잎이 피고
떨어지면 또 뿌리에 스며 나무에 올라
나무는 그 세월 환했던 것이다
사랑을 덜어내어 무성했던 것이다
겨우내 춥고 할 말이 많아도
주변에 봄의 씨를 지켜보고 있기에
스스로 켜 논 기다림의 힘으로
함박눈 오면 눈꽃을 달고
겨울이 오면 모든 물기를 끊고
자기와도 이별한 후
한 번 더 단단해지는 것이다
학교 수위실 난로
수위실 봄맞이 날
난로를 분리해 턴다
겨우내 온몸이 빨겧다
그래서 겨울은 밝았다
수위, 경비들의 수고와 한숨
들르는 손님과 교사들의 세상 이야기를
안사람처럼 귀담아 모두 태웠다
그래서 겨울은 따뜻했다
아무리 태워도 남는 속세의 의문
화장火葬도 해결 못한 그을음은
연통 안에 새긴 채
여기 사람들의 추운 계절을
불순물 없는 카본 한 종지로 걸렀다
밝을 수만 있다면
따뜻해질 수만 있다면
오로지 제 맘이 붉어져
태우고 타 빈 몸이 되는 나이 든 난로
추운 세상을 기다리며
또 따뜻한 겨울을 밝히려
어디에선가 그을음의 남은 눈물을
닦아주고 있을 것이다
빈자리가 크다
새벽 지하철
지하철에서는
대부분은 졸고 대부분은 잔다
새벽이 벅찬 영혼들이 덜 깬 채
세상의 일터로 끌려가는 시각
홑점퍼 조차 무거운 희끗한 중년의
새벽철마는
유독 삐걱이는 소리가 아프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지하를 지나는 어깨 위
숙명처럼 쫒는 가난과
어찌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먼 곳만 응시하는 시선 끝
가족이란 이름의 눈망울이 매달려
오늘도 천정의 손잡이처럼
나란히 흔들리며 떠나야 하는 이들
깜깜하게 출발했듯
깜깜하게 돌아올 길
철교 아래 새벽 강엔
선혈진 주름이 뒤덮이고 있다
긴 배웅
세상은 가만두지 않네
쉽게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지
어설픈 건 정제되고 세련되어 가지만
그리운 것들도 가져가지
쌓였다가 허물어져가며
누군가는 병들고 죽고
누군가는 가까워지고 멀어져 가네
어제의 그림자가 없다면
오늘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기에
그림자 끼리 끌리는 세상
쳐다보고 쳐다보면
그 모습에서 걸어 나오는
왠지 철들어 슬프지만
어딘가 낯익은 모습
업그레이드 된 사진 파일을 가슴에 묻고
재회를 위해 자꾸 세월과 헤어지네
세상엔 이별의 곡이 너무 많아
전단지처럼 날리는 새 이별과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세월을 디디며
호주머니에 넣고 가는 새 그리움
꽃 화석
꽃은 꽃에서 피진 못하지
뿌리에서 흙 속에 박힌 새순 얻어 오지
흙이 박혔고 나무 알갱이가 꽂혔고
혼자라는 점과 외로움의 선에 찢긴 뒤
피로 맺힌 한 송이 꽃빛 품고 솟지
인생 몇 십 년 다 써보니 꽃만 들었나
박토의 찌꺼기와 부러진 뼛조각 목각
꽃잎 같았던 첫사랑의 화석까지
조각 파편과 목탄들 빈틈없는
점박이 화강암
긴 세월 짓눌려도
꽃 한 송이 안고 있는 돌덩이
아직 품고 있는 건
내일은 화염이 올까
쪼개져 빛을 볼 세월이 남았을까
내일은 스스로 등신불이 될까
최후의 단근질을 꿈꾸기 때문이지
손잡이
손 내밀어야 한다
하늘과 손잡으려고
나무들도 잎새를 내밀고
풀도 줄기를 빼낸다
꽃은 잎 밑에서 올라서
눈길과 닿아보자 한다
손이 없는 것들은
몸으로 입으로 닿아야 한다
그마저 없는 것들은
햇볕이라도 모아 뿌려주어야 한다
닿아야 따뜻해지는 일이
아내뿐이랴
닿으면 붉게 따뜻할 수 있는
이 몸 하나 누군가의
손잡이가 되어 잡혀 주는 일
하늘과 닿는 일은
나무만의 일이 아니다
사랑을 잃은 모두의 심장을 꺼내
반원으로 구부려
하늘에 걸어 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