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具常 큰 스승님


 훤출한 키의 단아한 학자풍 선비 모습.학의 이미지. 1970년대 중반 어느 봄날 구상 스승님이 강의실에 척 들어서실 때 뵈온 첫 인상이었다. 시창작 교실을 강의하셨는데 영어 단어장으로 흔히 쓰던 카드식 강의록을 준비하셔서 손에 들고 계셨다. 전달해주시고자시던 시의 세계와 체계에 대한 이론을 심혈을 기울여 설명해주셨고 동서양의 시를 엄선해 예제로 전달해 주셨었다. 그 당시 우리학과에는 한국의 내노라하시는 시, 소설의 대가들께서 출강을 하셨는데 강의록을 만드셔서 오시는 분은 구상 교수님이 유일했다. 그것이 문학에 목 말라하는 문학도들에게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건네주시려던 스승님의 꼼꼼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비쳐 마음에 귀감이 되었었다.
창작교실 수업은 작품을 위주로 강평하며 진행하는 수업방법이 주류였지만 교수님의 강의 시간엔 감각적, 즉흥적 강평이 아닌 체계적 이론을 겸비한 평과 배경 이론이 철저히 함께해 선문답식 강의가 배격돼 있었다. 그렇다. 스승님을 떠올리면 낮추시어 겸손하고 간절하여 챙겨주시는 참 학자이셨음이 떠오른다.
스승님은 나와 종씨인지라 첫 대면 부터 집안 어른을 뵙는듯했다. 어느 날 여쭤보니 항렬 또한 우리 조부님과 동항렬임을 알고는 친할아버님을 만난 듯하였다. 친할아버님은 집안에서도 자랑하는 학자였다고 한다. 어렸을적 돌아가셔서 가르침을 배울 기회가 없었으나 대여섯 살까지 무릎에 앉히시고 능금을 깎아, 먹으라시며 귀여워해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한 나에게는 안타까움이 내재된 전설적인 인물이셨다. 그러니 자연 구상 스승님을 뵙고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보태 연민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학과에서 제일 먼저 군복무를 마치고 오게 되었는데 스승님은 “병정 갔다 온 준회”라고 불러주시곤 하여 남다른 기억으로 날 알아주시는 다정함에 행복감을 느꼈었다. 그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스승님 앞에 가서는 “병정 갔다 온 준회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랬었다 스승님을 생각하면 낮은 옥타브의 보드라운 음색으로 다가오는 자상하신 인품이 먼저 떠오른다.
스승님은 대철학자이셨다. 스승님의 추모제를 여의도 성당에서 가질 때 신부님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소서라는 기원을 하셨다. 나는 그 기도 대목에서 “그렇다 저거다 스승님을 한마디로 응축한 단어는” 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말씀은 모두 잠언이셨고 깊은 철학이 내재된 성구였다. 잔잔하나 파고드는 깊이는 수십 년이 지나도 끝없이 갈고 닦아진다. 참 오묘한 일이다. 어찌 인간의 말이 그 오랜 세월 다른 인간의 인생에 나침판이 되고, 넘지 말아야할 울타리가 되고, 가야할 곳으로 점지 되어 다가올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섬��한 것이 있다. 30년 전 공간사랑에서 시낭송회를 스승님이 주관하셔서 열리곤 했는데 스승님이“까마귀”라는 시를 낭송하셨었다. “까악 까아악” 이라는 싯구를 낭송하실 때 나는 온몸에 전률을 느꼈고 지금까지도 그 느낌은 생생하다. 스승님은 원래 폐 수술을 하셔서 폐가 하나였는데 이 싯구를 낭송할 때는 태산이 덮쳐오듯 오싹하였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잘못된 길로 생각이 미칠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스승님의 그 까악 까악하는 전률음이 경계경보처럼 들려 날 바로 세우곤했다. 나지막하나 이시대 마지막 양심지킴이로 수많은 인생을 바로가게하시는 힘이 있던 음성, 먼 세월을 넘어 영향을 주시는 잠언을 늘 들려주시던 모습이 오늘 몹시 그립다. 그리고 몇 개의 단상들이 떠오른다.
스승님은 여의도 아파트에 관수재라는 현판을 거시고 생활하셨었다. 여의도가 직장이었던 터라 가끔 63빌딩 식당에서 뵐 때가 있었는데 예외 없이 손님과 함께 계신터라 인사만 여쭙고 식사대접을 드릴 수가 없었다. 계산이라도 해볼랴치면 스승님은 절대 용납치 않으셨고 얼마나 단호하셨던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분의 인생철학이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 연하장을 보내오셨는데 자세히 보니 글자하나가 조금 이상했다. 자세히 보니 획을 하나 잘못 쓰셨던 모양인데 그 글자를 칼로 살살 긁고 덧쓰신 것이었다. 새까만 제자에게 글씨 하나 쯤 뭉개고 쓰셔도 되련만 칠순 노인이 연필깍는 칼로 그 글자를 긁으시는 것을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지막 세배를 갔던 날 구상문학 전집이 새로 나왔다며 주셨다. 첫 장을 넘기니 구상이라는 함자를 친필로 써주셨는데 글씨가 죽 쓰신게 아니라 점점이 그려져 있었다. 손이 떨리신 그대로가 써진 것이다. 점으로 이어진 그 글씨를 보고 울컥해짐을 참을 수 없었다.
스승님이 지병으로 힘드신 상황에서 당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상 문학관 건립이 추진 되었고 그 일로 왜관의 원 관수재를 두어 번 갈 기회가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생활하시던 살림집 관수재는 칠곡군에 증정되어 구상문학관으로 재탄생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풍우에 시달리고 세월에 씻긴 낡은 목조 건물은 처마에 관수제 세 글자를 펄럭이며 헐릴 날을 기다리는 운명이었다.
스승님이 머잖아 떠나실 것을 다들 예감하고 있던 시기. 관수제 흙먼지 하나에도 웬지 그분의 것인냥 안타깝기만 하였다.

남녁 땅 왜관 찬바람 휘도는 강변엔
구상 큰 스승님 젊은 날 먼지로 앉혀 논
뽀얀 기와집 한 칸
누렁이만 목쉬어 바람보고 짖는다
　
이 없는 문짝 세월에 흔들려 삐딱하고
문풍지 찢긴 살결 강바람만 넘나드는데
관·수·재 바랜 붓글씨 떨어질 듯 접혀
허연 이끼를 달으려 한다
　
시심을 띄워 보내고 낚으시던 나루터 기둥
세파에 상한 몸 무너질 듯 비켜 섰는데
강물은 무심히 두고 가고 두고 가고
　
뚝 길을 한없이 걸으며 강 연작시를 지으시던
여기가 피어린 낙동강
천사 같은 아들 안고 곧은 낚싯대를 드리울 제
원산 바다 못 가는 실향의 물살이 강에 어리어
얼마나 아린 그리움을 흘리고 담으셨을꼬
　
강바람은 펄럭여 예나 없이 차가운데
관수재 열려진 문짝 안 환히 앉아 계신 스승님
강물도 고요히 발꿈치 올리고 지나가네
누렁이도 툇마루 밑에 턱을 괴네　

( 관수재 기행 2000/1/24
칠곡 왜관 구상기념관 건립위원회의를 다녀와서)

스승님의 인생 행보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던 일은 장례식장의 참배 인파를 본 순간일 것이다. 최고의 권력자부터 고무신을 신은 필부까지. 번질한 사람부터 휠체어를 탄 불구자 까지, 승복을 입은 사람부터 수녀복을 입은 사람까지, 거지, 깡패 등 계층, 성별, 연령, 귀천을 가리지 않고 교류하며 품어주신 어른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향파사해의 인생을 사신 행로가 사람대함만 그러했겠는가. 시 한 구절구절에 녹아 있는 사람 귀하게 여긴 마음이 얼마나 간곡하고 안타까와하셨는지 모르겠다.
“원숭이는 똥구녁이 빨개도 부끄러움을 몰라 원숭이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찾을 때 인성을 찾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었는데 나는 둔재인지라 스승님의 깊은 가르침을 간파치 못하거니와 깨달은 것 조차 따르지 못하고 살면서 늘 부끄럼조차 잊고 사니 참담히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교단에 서며 가끔 학생들에게 “마음 속에 스승 한 분쯤은 길러야한다”라는 말을 한다. 스승이 없는 세상, 스승 한 분 정도도 간직하지 못하고 요즘 학생들은 사는 것 같아 안타까와서 하는 말이다. 이제 스승님은 가셨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언제까지나 할아버님으로 살아계시고 스승님으로 살아계셔서 나에게 능금을 깎아 건네주시고 계시다.
이 글을 마치자니 밤처럼 어둡던 마음이 여명을 받는 느낌이다. 스승님을 기리어 각개인사들과 친우들이 몇가지 사업을 전개해 업적을 더듬는다하니 참으로 기꺼운 일이다.
아무쪼록 이토록 아름다운 분을 우리와 후세인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사셨던 만큼만 꼭 전달 되었으면 좋겠다. 고마운 일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스승님 이건 괜찮죠?                       

                                                                                     具濬會

후기- 사람 이야기 둘

                                    가을 음악회


친구의 초청으로 가을맞이 음악회에 갔습니다. 텅 빈 무대에 피아노 한 대, 그리고 30여 명의 합창단이 처음이자 끝인 공연. 아무런 장식 없는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만으로 몸을 떠난 음이 낮게, 높게 휘돌고 멈추며 파도를 탑니다. 어느 대목에서는 초원이, 어느 대목에서는 웅장한 산이,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고, 대양이 넘실댑니다. 화평이 있으며 전율이 있으며 슬픔과 사랑도 왔다 갑니다. 인생입니다. 30여 개의 목소리만으로 이런 영상세계를 펼쳐낼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웠습니다.

더 아름다운 것은 친구의 마음 씀입니다. 오십 중반의 가을날 저녁 우리 부부에게 준 선물. 흔히 술잔이나 기울이며 잘 풀리지 않는 현실의 서글픔이나 나누는 게 아닌, 사람의 소리 중에 이런 소리도 있으니 들어보자는 손내밈. 그것은 사십년지기 친구의 멋든 중년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름답게 나이 먹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았습니다.

프로그램이 흘러 3부 순서로 접어들고 합창 사이에 한 여성의 독창이 달 떠오릅니다. 잔잔한 합창 속에서 오롯이 치솟아 팔랑이는 하나의 선율이 음악당을 전율케 합니다. 그것은 새의 소리였습니다. 머언 이국에나 산다는 어느 화려한 몸태의 금관조나 무지갯빛 앵무새쯤 될까요. 곱게 솟아 곡의 중간을 당겼다 튕기는 듯한 어우러짐. 고독한 듯 슬프고 시냇물인 듯 바람이 되어 사라지곤 또 나타나는 음선…….

내 어린 날과 젊었던 날, 그 아름다운 시절에 듣고 읊조렸던 곡이었기에 그 시절 내 모습도 스쳐갔습니다. 독창처럼 고독 많던 나이 때도 있었고, 폭포처럼 내리 꽂던 젊은 날도 있었지만 강물처럼 흘러 이제 잔잔한 여울목에 와 있습니다. 또 합창에 묻혀 살기만 했고 저 독창처럼 내 목소리 한번 우뚝 서 본 적 없는 씁쓸한 삶이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말없이 음악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온전히 소유해보는 음악회인지라 차분한 기쁨이 있었고 어느덧 무겁던 머리가 가벼워지며 맑아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숲속 길을 오래 걸으면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처럼 환해지는 몸과 머리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친구 부부도 의자 깊숙이 기대 일상을 내려놓고 가을맞이를 잘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박수소리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두 번의 앙코르 곡이 끝났는데도 오래토록 박수소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칭찬입니다. -참 잘하였다.

그것은 존경입니다. -훌륭하다.

그것은 나눔입니다. -당신으로 하여 내가 행복하였다.

그것은 거둠입니다. -잘 살았구나.

그것은 이별입니다. -잘 가요. 나도 떠날 때가 되었어요.

그냥 일어나서 가기 전 끝없는 박수로 끝나는 공연. 그런 삶이 여기 있었습니다. 잘 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박수소리가 꽃잎처럼 내리는 속에서 바라는 그 날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구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