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자연의 여정

신년목 新年木

겨울나무에 손을 대보면

살이 터지며

새해를 맞는다

세상 모든 나무의

아련히 찢어지는 성숙의 소리로

한 해는 열린다

속살로 새로 쓰는 한 해이려고

어제의 생각을 찢고

내일의 새 생각으로 열리는 날

속살로 일어서는 아침을 맞으리

흙이 터져야 새싹이 돋듯

부끄러움이 터져야 새 길이 오지 않던가

속살이, 내면이 아프지 않은 것 어디 있으랴

그래서 용광로빛 태양을 맞아

새로 뜨겁게 달궈보는 것이다

한 해 한 해가 더 빛나는 인생이 되라고

내 안에 성숙한 사랑을 끌어 올려

풀어내는 일

새 하늘을 짓는 일이다

버리라고 새해가 있는 것이다

3월의 햇살

아침은 교실 책상에 머물고

병아리빛 햇살이

작은 교복의 단발머리와

아직 웃음이 비린 머슴애들의

입 안 가득 반짝인다

안개 커튼 너머

먼 동네 지붕은

손거울처럼 빛나고

사람의 마을을 폭포처럼 어루만지는

하늘의 손길

사랑 때문에 해는 뜨고

오늘도 햇살은 그 많은 길을

빠뜨리지 않고 비추어오거늘

아, 사랑해야지

사랑하지 않고 사는 하루나

사랑받지 못하고 사는 하루는

얼마나 저리고 아프던가

목숨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목련보다 더 꽃다운

개나리보다 더 희망인

너희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며

글자마다 촉촉이 입을 맞춘다

칠판 앞에서

이곳에 오면 맑은 눈 가득

하늘의 푸른 얘기가 들리고

이곳에 앉으면 살아야할 세상 얘기가

보석 알갱이처럼 영롱히 반짝이며

지혜와 슬기를 주는 곳

이 아이들이 그리는 하늘엔

동화가 살고 전설이 살고

푸른 솔과 벚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파란 곳이라서

그 속에 인간이 살고 즐거움과 아픔이

함께 묻어 한 세상을 이루니

같이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바로 귀한 이들임을 깨닫는 곳

한 사람이 무사히 한 세상을 살다 간다는 것이

지극히 위대한 업적임을

선생님들의 주름살 새에서 캐어내고

자유로이 기뻐하고 마음껏 슬퍼하며

일생이 준비되기를

저 밖이 어지러워도

세상은 한번 살아 볼 가치가 있고

섞여 한 번 꾸며 볼만한 땅이기에 낳아졌음을

스스로 알고 밝게 이 교실을 나가게 되길

한 장 칠판이라는 세계 속에서

우주와 맺는 수많은 언약의 별을 따 가슴을 키우며

내일의 하늘에 각자의 별로 오르기를

교정

아이들이 수업 들어간 교정엔

나무만 바람과 놀고

꽃들은 마실 온 처녀들처럼

옹기종기 모였네

산철쭉 같던 어린 날 한 무더기

멋 적은 아카시아꽃 날리던 학창시절

다홍 빨강 흑장미 흐드러지던 젊은 날

백목련 기도하는 중년

언제나

같은 하늘 배경이건만

나 이렇게 다른 꽃빛이던 건

내 안에 바람과 구름과

내 안에 소망과 슬픔이

붉게 흔들린 자취일러라

그때 울음은 왜 붉었던가

어찌 그리도 어두웠던가

보라빛을 왜 사랑했었나

꽃잎마다

인연 하나

사연 하나

나풀나풀

제 빛깔처럼

울고 웃고 사랑했던

꽃같은 사람들

지금은 터엉 빈 운동장 위로

한줄기 바람이 지나고

달리는 발자욱

함성지는 졸업생들의 소리만

싣고 떠난다

시험감독을 하며

나뭇잎이라면 새싹이고

하늘이라면 여명이지

배움 익혀 시험 보는

오늘은 중간고사 시험 날

흰 칼라 와이셔츠 위

뽀오얀 얼굴들

눈동자 빤짝이며

닭 모이 쪼듯 답안지 작성하는 소리

턱을 짚어 보고

손톱도 물어 보고

갸우뚱 고개도 틀며

하나하나 맞혀가는

못 본 세상의 문제들

후레쉬 섬광 속에 헤어질

친구들이지만

저 먼 세상 긴 세월

삶의 통과도 결국

중간고사처럼 꼼꼼히

풀어가야 하는 것

교실 흰 벽에 패인 낙서 한 자

찍힌 발자욱마다

젊음의 한 때 그려 논

방황의 조각이거니

딱딱한 철제 합판 책상 위에서

익히는 이 날의 지식이

알알이 세포 되어 굵어가는 머리로

생에 빛 되어 밝혀 나가리니

이날은 생의 마지막 날

내일 다시 오지 않기에

최후처럼 살아

항상 이겨야 하리

네 온 몸과 마음이

교실에서 자라고 크는 괴로운 세대라도

어쩌겠느냐

바깥세상이 너희를 가두고

누르고 시험해도

가끔 창밖 은행나무 새잎을 보며

자라는 보람에

하루하루 기뻐하자

알지 못하는 세상 얘기

세상 이치

혹여 나중에 달라있대도

이날은 후회 없는 날이었기에

새로 지어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참 살아볼만한 세상

너희들이 짓거라, 만들거라

선생님은 손 모으나니

나무라면 새싹

하늘이라면 동트는 여명

준비된 한 세상과

계절을 향해

오늘은 교실을 즐기자

그 아이를 안다

3학년의 그 아이를 안다

세상은 거짓말하지 않으며

정확히 돌려준다는 것을 믿는

그 아이의 바뀐 생각이

그 손과 발과 머리를

끝없이 움직이게 하던 것을

그 아이의 겨울과 여름

가을 끝 무렵 드디어 커져버린

꿈을 가까이 하게 된

큰 아이가 된 것을

하나가 잉태하는 열

열이 번성시킨 백

어느덧 세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 아이

내 발이 움직이지 않고는

한 발자국의 땅도 개척할 수 없다는

믿음이 거둔 열매

3학년의 그 아이를 안다

진달래 울음

진달래 꿀 마시던 산새 한 마리

그 맛 취해

진달래 꽃 따서 물더니

나뭇가지에 앉아

낼름 진달래 꽃잎을 먹네

진달래 꽃잎에 올라온 봄의 맛이

진달래 꽃잎에 물든 봄의 색깔이

하 달아

입맛으로 맞이하는 새의 봄

새 속에

봄 가득하니

새 울음 온통 봄소리

봄 하늘 가득 진달래 울음

봄 산에 오르며

“너는 진달래였구나."

“너는 목련이었구나."

겨우내 어둔 가지 나무들

“저예요."

“저였어요."

궁금하던 이름을 밝혀주는

꽃 터지는 산

잎 질러 온몸으로

꽃 마다 빛을 틔워

이 화아한 산에선

아프고 어두운자 다

한그루 꽃 되니

살아 있으매 사랑하고

서 있으매 빛날 수 있고

소망이 있어 기도할 수 있기에

‘나는 진달래였구나."

‘나는 목련이었구나."

새 꽃 터져 오르는 봄

봄 소풍

봄길 따라 예 왔네 영월

겨울나무와 봄나무 엇갈려

옷 갈아입는 속삭임

산은 연초록 녹향

돌복숭아 선자색 빛

시냇물에 떨궈

봄의 마음 물길에 퍼지고

하늘을 내려 담는

새순의 어린정기로

소곤소곤 어지럼증 나는 산밭

붉은 꽃잎

송어집 마당에 내려

실바람에 살폿 가슴을

젖히는데

툇돌 틈에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초 향

또 어지럼증

이 모든 살아나는 것들 맞으며

하루하루 져가는 일도

생각하면 행복일러

봄에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새싹을 흔들며 갈 수 있어

녹향에 휘감기는

한 점 하늘 될 수 있지

비의 섬

큰 비가 온다. 어느 먼 섬 이야기가 방울져 이땅에 심어진다. 장마 속 모두는 섬이 되어 가끔

각자의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본다. 세상의 땅을 발견하지 못한 비둘기는 언제나 버들잎

을 물고 오지 못했다.

너의 섬이 먼 것은 나의 육지가 되지 못한 그대나, 귀향하지 못하는 나나, 하늘이 준 형벌처럼

서로가 기다림이었다. 우리의 여름을 놓아주지 않는 장마 사이 태풍 몇 손님처럼 들렀다 간 자

리, 더 허물어질 것 없이 패이고 깎인 집 한 채 울고 서 있는 언덕, 우리들의 아이들만 깃발을

젓고 있다.

장마 속에서 날개를 펼쳐봐야 젖은 날개가 더 무겁고 날 하늘이 없다. 섬은 밤마다 겨드랑이가

가렵다. 각자의 퇴화된 날개가 꿈틀거리며 한 번의 봄, 뛰는 피의 박동을 기원하는 파도만 친다.

파도 옆에서 기다림은 깎여간다. 마지막 웃어주는 나의 육지, 나의 항구를 향해 언젠가 이 가려

움도 멈출 때 내 띄운 비둘기는 월계수 잎을 물어 올 것이다.

섣달

먼 북방에서 달려온 바람이

헐벗은 몸 사이를

가닥가닥 훑고 지나면

이 땅엔 뼈로 남는 것이 너무 많구나

허공을 젓는

뼈의 흔들림  

뼈의 손끝

뼈의 눈짓에

매달린 그림자들

이땅엔 울음이 너무 많구나

하늘 땅에

나뭇가지 끝에

우리들 창문에

매달리며 매달리며

울어야만 하는 사연들

먼 옛날부터 그렇게나

서러웠던 사람들 모두

이 겨울에 달려와

낮 밤으로 울부짖는

벼랑 끝 호곡乎哭

이땅엔 못 다 푼 설움이 너무 많구나

겨울은 그들에 의해

추워지고

섣달은 끝내 뼈끝마저

서럽다

겨울상가

모닥불 빠알간 살점이

탁탁 하늘로 튀어 오르면

우리는 등 뒤의 어둠과 반쪽의 따뜻함으로

겨울벌판을 지켜 서 있었지

별은 왜 그리도 멀리 있어

우리의 침묵을 그립게 하던지

이런 밤에 죽어가는 영혼이

겨울 밤 하늘의 차가운 소리를 타고

불씨 하나 지워지는 그 순간까지

이승의 힘겨운 옷을 벗고 가니

삶이란 어둠과 빛 사이에

깜빡이다 꺼지는 모닥불씨

빨간 살이 탁탁 터지는 모닥불을 쬐며

우리는 어둠을 등에 지고

상가의 불빛을 바라보며

지금 떠나는 망자의

말 없는 체온을 생각한다

남은 자의 등뒤로 어둠은 숨고

영혼과 함께

누군가 별로 돌아가는 시각

청아한 하늘엔

시리도록 빛나는 별의 입적식

미루나무

미루나무 서 있듯 나 있고

잎새 지듯 내 진다

까치 하나 밟고 떠난 자리

출렁이는 소문 한 개

안개가 산다는 캐나다

눈이 산다는 알래스카

평생 별러도 못 가는 곳을

하늘이 이어주는 푸르른 창공

가을엔 그래서

미루나무마다 물살이 저리도 뒤척이고

눈 뜰 수 없이 시리기만 했다

화촌면 두촌리

네 살던 마을엔

하얀 깃털 하늘이 내리고

실같은 골짜기

은 연기 밥짓는 소 울음

풀인 듯 초가인 듯 옛 같잖아

매미소리 찢어지는

미루나무 흔들림

꿈속인 듯 서녘 해 따라

만장을 휘날리는 하늘엔

네 간 곳 찾는

붉은 정만 저리게 퍼졌다

눈물나게 더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

가슴 아픈 이 세상을 놓고

눈물밖에 없는 세상을 놓고

이국으로 떠난,

네 살던 마을엔 오늘도

하얀 깃털 하늘이 내린다

망월사

눈물 없이 울며 보냅니다

울음 대신 목탁 턱턱 숨 막히는데

반야바라밀다심 초연한 염불만 하산하는

원도봉 계곡 망월사

속세를 보느니 달을 보는 곳

달이 유일하게 인간을 보는 곳

반야바라밀다 수천 폭포 타고

몸 부수며 떠나는 곳

도봉도 말없이 살라하고

물 같이 살라하고

산길은 구비 구비 인생 같은데

그렇게 떠나보내고

물 따라 내려오는 길

서녘 노을 파도 붉디붉다

옴마니 반야 옴베오

또 삼척 바닷가

살아봐라

외로우면 다 파도가 되는 거다

뒤척이게 되고 출렁이게 되고

부딪치게 되고 부서지게 된다

더 살아봐라

세상에 파도 아닌 이가 누가 있으며

물보라 없는 눈동자가 어디 있으랴

그렇게 흘린 눈물이 삼척에 모이면

바다가 된다

독도는 비

독도에 비가 내린다

두 가슴에 파도가 엉킨다

수평선만 동그란 바다 길

스스로 남남인

아픔 하나씩 걸어 놓고

암섬, 숫섬 다른 고독

비에 젖는다

사람마다 섬같은 인연

바다마다 독도

한없이 외딴 바다에서

다가설 길 없는 서로의 슬픔만 자라

푸른 두 점 섬으로 솟아도

눈길은 비 너머 먼 별

이 지상 올 때나 갈 때처럼 혼자인 자리

섬에 앉아 섬을 본다

각자의 섬에 아픔이 흐른다

돌아앉은 고독에 비가 묶인다.

그토록 섬은

생각때문에 부서지잖고

망망할수록 한 점 노래가 되어간다

아스라이 저린 느낌표 하나

경포대·4

지울 수 없는 것이 많아져

살수록 고독해지는 파도입니다

털어 버리자고 헤매 돈 날들

그마저 지우자 떠나던 날들

돌처럼 풀처럼 살려고

모래톱에 누웠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용서되지 않는 것에 뒤척이다

스스로 멍 들린 육신

동해나 가 살 부벼 살자고

수평선 바라 헤엄쳐 갑니다

누군들 행복을 뱉고 싶겠습니까

세상밖에 버려져 울고 싶겠습니까

내가 버리지 않았는데 나를 버린 것들

용서가 않돼 세워 논 것들

동해가

재울 수 있도록  덮어줄까요

대답도 없이 세월은 밀려왔다 밀려가고

더욱 고독해 가는 경포대 파도 옵니다

온 바다에 멍울 칠해 다 같이 저린

이 지상 눈감게 하는 칼파도 옵니다

한 바다가 흰 주먹으로 눈물 씻으며

백사장만 자꾸 때립니다

관수제 기행     

남녁 땅 왜관 찬바람 휘도는 강변엔

구상 큰 스승님 젊은 날 먼지로 앉혀 논

뽀얀 기와집 한 칸

누렁이만 혼자 바람보고 짖는다

문짝은 이 없는 세월에 흔들려 젖혀졌고

문풍지 찢긴 살결 사이 강바람만 넘나드는데

관수제 바랜 붓글씨만 떨어질 듯 접혀져

허연 이끼를 달으려 한다

시심을 띄워 보내고 낚으시던 나루터 기둥은

세월에 시달려 무너질 듯 의지해 섯는데

강물은 못 본 척 다가서다 두고 가고

뚝 길을 한없이 걸으며 강 연작시를 지으시던

여기가 피어린 낙동강

천사 같은 아들 안고 곧은 낚싯대를 드리울 제

원산 고향 못 가는 실향의 물살이 이 강에 어리어

얼마나 아린 그리움 흘리고 담으셨을고

강바람은 펄럭여 예나 없이 차가운데

관수제 열려진 문짝 안 환히 앉아 계신 스승님

강물도 숨죽여 발꿈치 올리고 지나가네

누렁이도 툇마루 밑에 턱을 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