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부  나의 길

약속의 길

내게 약속한 저기까지 걷는 길

이제 보이는 작별의 그 길 끝

수십 년 부대끼며 눈물 웃음 피웠던

스쳐간 얼굴 꿈처럼 겹쳐지는 날들

아름다웠던 사람과 사랑했던 나의 길

부르던 노래는 인생의 파도가에 흩어지지만

한 길 끝나 다시 이어지는 숲 속으로 난 길

내게 약속한 거기까지 걷는 길

어느덧 그 길 끝이 보이네

지난날 아름다웠노라고 흐르는 황혼 너머

눈처럼 하얗고 별처럼 빛나는

본래 나로 돌아가는 숲속으로 난 길

홀로 소리 없이 흐르는 또 하나 나의 길

내게 약속한 함께 걸어온 길

어느덧 그 길 끝에 와 있네

사람 속에 사랑하며 울고 웃던 길

이제 벗어나 숲속으로 난 홀로 가는 길

초록 풀 붉은 흙과 같이 가는 길

나를 벗고 다시 사는 즐거운 길

퇴근길

가장家長들 속을 헤치고 출근해

쌓은 것 없이 덜어내고 돌아온다

무거운 몸으로 한없이 가벼워져

돌아드는 귀처에

눈물보다 더 끓고 있는 현실이

추운 밤을 떨고 있다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아내야

아들아 딸아

살집 연한 앳된 것들아

갈대밭에 바람 핥고 가는 주름살 나이

갈대로 엮어 놓은 어설픈 둥지에

흘러가는 바람들, 진눈깨비, 눈보라들……

속빈 갈대집이 우는 소리 꿈결처럼 들으며

어깨 처진 가장들 속을 걸어걸어

뼈 속으로 부는 바람 따라

이어 가는 길

옛터 이사

나 돌아온다

이십 년을 살다 떠났던 현저동101번지

같이 떠난 부모 동생들 십 년 세월에 잃고

병들어 홀로 돌아온다

양철 무궁화 나무대문, 말 없던 석가래 대들보

입춘대길 써 붙이던 아버지, 도마 소리 또렷한 어머니

뜨개실 감던 여동생, 군복 입고 들어서던 막내

저승과 이 땅 어드메 따로 두고 홀로 서는 비탈

추억보다 더 차곡차곡

고층 아파트 서 있고

무르팍 까지던 비탈길

끝없이 올라야 했던 돌계단

흙 한 점 없는 아스팔트에 검게 덮였다

늘 술에 취해 더 까맣던 연탄집 아저씨

장기판으로 항상 시끄럽던 복덕방 노인네와

덕지덕지 납땜으로 소리 살리던 전파사 총각 아저씨도

다 어디로 떠나 버렸는지

서럽게 살다 간 어머니 아버지의 첫 터

여동생 남동생과 나

유년의 번지는 사라졌다

현저동 101번지

나는 돌아와서도 돌아오지 못한다

이삿짐

트럭에 실려와 풀린 짐

살아 온 날만큼 무거워

낡은 겉표지

거울처럼 비치는

책 한권의 부피

먼지보다 더 까맣게

먼지보다 더 두껍게

딱지진 날들의 사람들

닦아도 닦아도 안으로 파고드는

삶의 까끄라기

이삿짐을 정리하며

수많은 사람 별같이 흩어지고

덮어진 어제와 만나는 밤

마음의 악기를 퉁겨

아름다운 시절의 아픔과 행복이

한 컷 한 컷 상영되는

늦은 밤의 어지러운 방안엔

먼지만 숨죽여 가라앉고

폐품이 품고 있는 사람 때문에

짐은 쉽게 풀지 못한다

책 이사

이삿날 책을 버린다

한 권 또 한 권

너는 대학 때 라면 대신 내 손에 왔었지

너는 청계천을 뒤지다 뛸 듯 기쁘게 만났지

네 몸의 투명테이프는 세월을 꿰맨 거구나

밤새 너를 읽다 감동에 올려보던 별들

고독 많던 세월 길을 알리고 위로해 주던

너를 얻고 기뻤던 날이 어제인 듯한데

빈한해져 좁은 집으로 옮기며

꽂을 데 없는 책

40년 50년 여정 함께 했던 책을

혈육 베어내 듯 버려야 하는 밤

책 하나 지키지 못하고 이별해야 하는 세상에

내 몸 지키듯 이겨 온 세월 끝에

너 마저 떠나보내야 할

삐꺽이는 좁은 생활이 서 있다

이제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할 때

한 세월 사느라 따라온 짐들을 보낸다

너를 버리며, 살점을 도려내며

그 혼만 간직한다

오늘은 내가 바로 너란다

   감자탕을 먹으며

뼈에 붙은 살 맛 살살 뜯어내고 쪽쪽 빨아

삶의 맛을 발라내는 감자탕을 아시나요

감자탕 한 솥 펄펄 끓여

온가족 뼈 잡고 한 입 쪽쪽

입 맛 혀 맛 사는 맛까지 빨다보면

세상 눈치, 불편한 마음 다

얼큰한 국물에 녹아 한 솥에 뛰는

감자탕을 드셔보셨나요

그 맛 한번 보시면

가족 그리워 못 잊고

그 때 그리워 못 살고

그 얼굴 그리워 또 모이죠

우리가 한 솥 한 국물 내야하는

한 뿌리였기에

섭섭한 옛 일 쯤이야

휘청, 출렁, 얼쑤 녹아 나는

속 풀이 가슴풀이 국물, 감자탕입니다

감자탕을 먹어보면 알게 되죠

우리도 서로의 뼈를 잡고

알알이 맛좋은 살붙이 한 덩이

아련한 감자탕이 되는 것을

뿔뿔이 이웃사촌 되지 마라 말하는  

톱니 앙다문 뼈

그 뼈 붙잡고 놓치 않는 삶

감자탕을 먹으며 펄펄 뛰는 가족사랑

한 국자씩 더 드셔 보세요

짐승 이야기·1

살다보면 짐승이 돼야하는 날이 있다.

동화책의 토실이나

실화 속의 충견

원앙소리 내며 걷는 소쯤이 아닌

최대한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며 울부짖어 위협을 가해야하는

야수

딸을 기르는 아비는 짐승이 돼야할 때도 있다

가슴을 다쳐 무엇으로도 약이 없는 때

적을 향한 아비의 울부짖음이 치료제가 되는 날도 있다

그 때 아비는 짐승이 되어 날아올라

비수같은 발톱과 이빨로

어떤 적이든 물어 버려야 한다

시멘트의 정글 속에서

모든 걸 떠나 자기편인 존재로

아비가 나서는 시간

죽어가던 아이는 아비를 발견한다

다시 살아볼 박동을 시작한다

솜털꽃같은 딸애에게 슬픔을 심지 말라

그러면 아비들은

아비라는 숙명이 명령하는

짐승이 된다

짐승이야기·2

           - 짐승의 길

짐승의 시간이 하루하루 스무 이레

살이나 뼈도 아닌 마음

다치지 말아야 할 곳이 깊이 파인

새끼의 상처를 핥으며

태산을 넘는 표효를 한다

품위도 이성도 잊은 지 오래

사랑도 용서도 버린 지 오래

오직 가슴 한 켠 터져오르는 화산의 피

용암처럼 흘리며 나아가는 길

법을 어긴 자 법 속으로

양심을 어긴 자 양심 속으로

인간을 어긴 자 인간 속으로

거칠게 사는 자 거친 속으로

보내버려야 하는 홀로 가는 길

무궁화 살구꽃 어우러진 학교 꽃밭에

한 점 선혈이 꽂혀진 꽃 지는 자리

한 짐승 걸어와 곧게 바라본다

짐승이야기·3

            - 짐승도 존재다

그 짐승 걸어가면 아픔이 걸어간다고

짐승들끼리 쑥덕이는 짐승의 길

보이는 대로

냄새 맡아지는 대로

울고 싶은 대로 가는 길

내 오늘 짐승이 되어

아내와 아이와 울타리 앞에 서 있다

날마다 잃어버린 본능을 길어 올려

이빨을 갈고 발톱을 드러낸다

발가벗은 생각으로 달려보는

세상의 계곡은 외로워도 슬프지 않다

내 속의 나와 나의 아버지와 선사시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은밀한 말

바라보지 말고 노려보아라

먹지 말고 씹어라

울지 말고 울부짖어라

분명한 하늘 아래

여름 무너지는 소나기 헤치며

겨울 쓰러지는 눈바람 밟으며

달려가는 길

잃어버린 내 오랜 옛날 버리고 온 길

짐승의 길

벌초와 나비

성곡사 종소리 나지막한 산간에

젖가슴 두 봉오리 어머니 아버지

초록 천지에 유순한 한 쌍

사랑을 지셨다

더부룩한 머리 깎아 드리고

담배 물려 향내 흐느끼니

산들바람에 졸린 듯

여름 뻐꾸기만 길었다

한 잔 또 한 잔

장남 고명딸 막내까지 절 올리니

여우비 붓던 하늘에 해가 터지고

나비 하나 모두를 떠나지 않는다

"엄마 왔나봐"

나비 앉아 손뼉 치는 젯상 턱 밑

찰칵 찍힌

삼남매의 한 컷 사진

비빔밥 수저 위에 웃음이 얹혔다

부부싸움

남자가 바라보았다

여자가 바라보았다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는 남자의 아픔을 보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의 아픔을 보고 있었다

하여 서로 아프지 않았다

하늘이 불을 끄고 있었다.

유리창이 어둠을 막아서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방안은 섬처럼 고립되고 있었다

섬 속에 섬이 있었다.

여자의 섬과 남자의 섬은 자꾸 고립 되고 있었다.

오 촉 전등이 낑띵대며 두 개의 섬을 붙잡고 있었다

 동생

향불 향기 창밖으로 누우며

황촛불 춤추는 아버님 제삿날

주름살 느는 동생들과

옛 벗인 듯 도란도란 얘기타 보면

밤은 찻소리도 숨기고

애들 손잡고 자꾸 뒤돌아보며

떠나가는 그림자

아릿한 통증까지 얹혀

골목 끝이 흐려지고

옛 얘기는 하늘로 올라 별 되어

아스라이 들르는 아버지 어머니

이 지상의 동생들 내려 보면서

깜빡깜빡 눈시울 적시고 있네

사망신고·1

몇 가지 인적사항을 꾹꾹 눌러 써

창백한 얼굴의 아가씨에게 건넸다

됐어요 한마디로

나의 어머니는 호적에서 주검이 되고

주민등록증도 수거 당해

이 세상 마지막 남은 생명의 증거는 사라졌다

죽어버린 반쪽의 육신 달고

끌며 당기며 온 16년 반신불수 세월

무슨 한 그리도 깊어 허공에 소리치던 치매증

쓰러진 남편 대신 엄동설한 폭염 속 행상으로

몇 푼의 동전과 싸우며

따라오지 않는 생활고 이고 온 13년

리어카 끄는 남편 찾아 무작정 상경하여

무허가 산동네 피난민 같은 8년

남편 없는 시집살이

밭 매고 논 갈고 시부모 모시랴 애 기르랴 허리 휜 7년

일제말기 초근목피

6.25전쟁 통에 공부도 못 마치고

여섯 동생 키우다 꽃다울 새도 없던 20년

아무리 따져 봐도 남들 그 흔한

한 때라는 것이 없는 희귀한 인생

됐어요 라니 아가씨

무엇이 됐단 말이요

어떻게 산 인생인데

이렇게 쉽게 끝나도 되는 삶이요 이게

어머니 별

사망신고서

종이 한 장으로 삭제되신

눈물의 어머니

내 어머니의 이름은 아-입니다

아-어머니

밤 하나 켜놓고

등 하나 켜놓고

세 살 딸애 팔 베게 베주고

30년 전 동요 불러주다 젖어보는 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아빠하고 나하고 놀던 꽃밭에

꽃이 피면 꽃밭에서 놀자 그랬죠

지금은 땅 속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손주딸 안고 불러 줄 노래

나만 살아 이 밤에 그 동요 부른다

노래는 곡조를 타고 밤길로 떠나고

이미 딸애도 꿈길로 떠나고

몇 남은 가사만 추억처럼 되돌아 와

입술만 답삭이다 주먹 훔치는 밤

마저 못 부른 그 옛 노래는

어느 하늘로 돌다 돌아와

뉘 있어 이 아이의 아이에게

팔베게 베어주고 부르랴

이모

어머니 뵙듯 왔다 갑니다

이모님

어머니 안 뱉은 속마음 다 듣고 갑니다

고단한 생

뒤틀린 팔다리 숭해

미동 않고 못다 준 정

그분인 듯 풀어놓으시던  이모님

닫힌 눈매 노을 지는 눈물은

그분 아직도 이 지상

남기신 한이라 읽고 갑니다

인연의 촛불은 다해 깜빡이는 방 안

그림자처럼 앉으신 어머니 뵙고 갑니다

저승에 보내듯 내 안의 강물 출렁이며 갑니다

창 너머 하늘이사 어느 시절이나 그러해도

오늘 더 깊이 뵙는 어머니

끊긴 인연보다 남겨 논 아픔이 움푹 저려

강변도로 석양은 유달리 붉기만 한데

단아한 목소리로, 얼굴로

그 분 마음

눈물 하나만으로 들려주는 이모님

이모 댁을 다녀오며

노을 지는 강가에서

어머니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면

조용히 강물은 눈물로 흐르지만

한은 하늘보다 넓어

흰구름 먹구름 천둥구름 몰려와

엉키는데

그 길 따라 붉어지는 어머니

아버님은 땅 속에 계시고

아버님 바람이 부네요

겨울이 부네요

아버님 계신  계절도

이미 가을은 지고 추위는 꼿꼿해

땅 속에 계신 아버님

이 바람 앞에서 깨닫고

걸음이 멈춥니다

내복을 유난히 두껍게 입어

벗기기가 힘들었었는데

그리 말 일이었나 봐요

삼베옷 세벌이 감당할런지요

예측 못한 엄동에 벌써

가슴의 살얼음은 균열도 멎고

다시 땅을 파야 하는 병

바람이 멈추지 않네요

추위가 저기 걸어오네요

겨울은 끝내 오려나 봐요

어쩌죠,

어떡해야 돼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