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내 안의 정돈

눈

내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어

한 줄의 시를 낳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오늘도 세상에 나가

시처럼 바라보았는가

노래처럼 말 하였는가

한 결 남을 위한 마음을 빌었던가

목숨 바쳐 사랑하지 못하고

적당히

최후의 한 줄이 되지 못하고

거기쯤

완전히 타 버리지 못하고

넘어온 날이 얼마인가

길어보아야 저기쯤인데

짧아보아야 여기쯤인데

마지막처럼 살지 못한다

세상을 위해

목숨 바쳐 저 눈처럼

뛰어내리지 못한다

눈에게 길을 묻다

나를 붙잡고

소복 끝 눈물을 보일 때

남은 자의 하늘에

온통 끓던 눈송이

물어도 울기만 하던 바람

북으로 펄럭이더라

산은 말없이 가슴을 헤쳐 주며

누워 쉬어라

한 때 뽀얗던 사람

관 안에 눕는데

상여 타는 불꽃 맵게 울더니 끝내

하늘로 지르는 연기

그 끝 타고 오르는 사람

그렇게 가더라 결국엔

살다살다 지치면 죽는 게 그리운 날

눈에게 물으니

바람 따라 울기만 하더라

노송

나는 대양의 어부가 된 적도 없고

세계를 누비는 상인이 된 적도 없고

울퉁한 근육의 쾌남이 된 적도 없으며

철책선을 총 들고 지켜본 적도 없다

그러는 사이 다리 힘도 없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병 친구만 몇

몸에 담았다

바닷가에 앉아 파도를 보는 일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움들이 다 바다로 떠가고

외로움들이 모래알로 묻히는

세월이 다녀갈 때

어찌 파도처럼 뒤틀리고

뉘우치며 부서지지 않을 수 없겠는가마는

내 몸 하나 조차

포말을 타고 하나 둘 흩어가고

남은 자의 일들로 바뀌어 가는 날에

하늘은 빛을 던져

바닷가 암벽 틈에서도

굽은 소나무는 푸르고 의연한데

하늘로 돌아가는 노을 길에

한 그루 노송도 될 수 없는

바닷가 바위 위 꺼져가는 몸만

물결에 자꾸 씻기고 있다

내 안의 정돈

           - 치매

나이 쉰 넘으니

산다는 게 깜빡깜빡

실수 쌓는 일이다

날마다 늘리는 것보다

버리는 일이다

기억이 허물어지는

자기를 목 위에 걸고

쓰러질 때까지 사는구나

그런 세월에도

잊혀지지 말아야 할

평생을 함께해 온 이름 하나

깜빡일까봐 적어놓고

적은 곳을 잊을까봐

붙잡고 있어야 했나

이젠 잡을 수 없는 사람

이름 석 자만 붙잡고 있는 것이

슬프다고

이젠 그만 놓아주라고

하늘이 정리하는 순리

오늘 아침 생각나지 않는 이름

내 살아 본 세상

내가 살아 본 세상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물은 분명 낮은 데로 흘렀고

바다는 구름이 됐고

하늘은 낮과 밤을 버리고 맞으며

사람마다 세월을 던져주었다

생각만으로 한 발자국 걸어본 적이 없으며

상상만으로 연탄불 한 번 지펴본 적이 없다

내 손 내 발의 수고와 땀이

일용할 양식을 데려와 주었고

내 심장 한 방울의 피만이

진정한 나이게 하였다

엄연한 세상의 계산법

가혹하리만치 정확한 정산법

세상의 광야에서 끝없이 움직이며

사냥하지 않고는,

세상의 책상에서 끝없이 연구하지 않고는

내일의 해를 맞을 수 없기에

짐승처럼 뛰는 애비

홀로 포효하는 애비들

세상의 정직함을 믿기에

어찌 손 놓고 숨 참고

살았다 하겠는가

내 한대로 나 받으리니

탓도 나요 운도 내 만드는 것

홀로 가는 길, 홀로 짓는 것

이 땅에 가득한 순리대로 사는 이들

눈물 흘리며 눈물 훔치며

살아 보는 길

내가 살아 본 세상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걸레질

마음의 방을

작은 손걸레로 닦으며

내 안과 밖이 같아

같이 호수가 되고

나와 나 아닌 이와 같아

같이 숲이 되고

나와 한 하늘을 나눈 모든 숨결들과 더불어

행복한 이 지상의 날이려고

닦고 닦으며

까끄라기만한 아픔이라도

알거나 모르거나 행하지 않아

슬픔에 적시는 일 없기를

닦고 닦고 닦으며

드러나지 않아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숨자리 하나 지어 갑니다

   말의 죄    

말 한마디 곱게 지으며 살으려

열여덟 해 학교 길 다녔고

말 하나 죄 짓고 살지 않으려

저자 길에서도 날마다 배워갑니다

말 하나로 만남과 죄와

말 하나로 이별과 후회가

말 하나로 나눔과 선행이기 원해

꼭꼭 씹어 말하고

되새김해 말하고

말없이 말하며

때론 닫고 살기도 합니다

말은 가벼워 들 수 없는 자 없고

말은 안 보여 생김새를 알지 못하며

말은 만질 수 없어 그 차가움과 뜨거움이

가늠 없으매

오늘도 세상 살며

나의 가벼움과 나의 흉칙함과 나의 차가움이

누구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마음에 원수를 사고

인연에 칼질을 했을까요

얼마나 세균처럼 흩어져 갔을까요

알면 무릎 꿇고

알면 안아 보련만

깨우치지 조차 못한 기망欺罔은

어찌하나요

(죽어 내 자리는 무간지옥일 겝니다)

이 아침

내 안의 말들을 안아주며

쓰다듬어주며

고운 꽃길로만 다니라고

말의 꽃잎을 닦아 봅니다

하관 이후

너는 땅에 묻히고

나는 너에 묻힌다

너의 곁에 산물이 흐르고

나의 곁엔 세월이 흐른다

살아 생전

품 안 물풍선 같더니

끝 모르는 하늘을 가는구나

구름이 눈물인 줄만 알았더니

수 많은 아기 밭이구나

바람에 밀려 떠도는 줄 알았더니

엄마 찾아 오고 가는 거로구나

툭-

산다는 일을 멈추고

아무 것도 덮지 않은 가슴 속에

사리 하나 키워간다

달동네 장례식

지금은 헐린

사십 년 전 달동네

한 통 전화에 이끌린 장례식장

어릴 때 어울렸던 아이들

하나 둘 오는데

가만히 보면

언뜻 그의 아버지들이 모이네

어린 시절부터 계속된

가난의 풍파 주름에 담고

집도 사람도 인연도 철거당하며

온 몸으로 살다 간

그의 아버지처럼

쉰 머리, 빠진 이빨, 희죽한  웃음

그의 아버지들이 앉아 있네

지금은 헐린 사십 년 전 산동네

그들이 살아 돌아오는

달동네 장례식

처마 밑에서

살수록 묻어나는 검댕이

역사처럼 때 낀 일상의 향이

우연 멈춰 선 곳

할배 할매 음성이

비바람 자욱에 묻어나고

천수답 밭떼기 한 뼘에 엎어져 살던

그 눈물이 하세월

젖었다 마른 굳은살처럼

하늘과 닿은 옹심 자리

아궁이 불쏘시개처럼

타들던 그리움

기다리고 기다리다

시렁에 얹어 놓고 간

홑바람 찾아

허리춤 올린 처마

생활은 지나갔어도

사람의 냄새 싣고

켜로 쌓인 검댕만

아직도 자욱자욱 살고 있네

작별인사·1

당신의 말 기억됨이 하나 없게

불면의 밤길을 걸어

동터 오는 백사장에 나가 앉아

눈물보다 기다림을 먼저 끊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없겠죠

억겁의 손들이 쓸고 간 모래톱

파도 엎어지는

여인의 젖가슴 빛 모래 헤치고

이 세상엔 스스로 묻힌 것도 많음을 알았습니다

내 맘의 기억 하나하나

바람에 무심히 먼 바다로

비늘 지어 노닐 때

당신의 이름 한 음절도 부름이 없이

하얀 치마 걷으며 돌아오는

새벽 파도 시린 발길 잡아 보고서

이 세상엔 스스로 잊힌 것도 많음을 알았습니다

치통

찌르고 쑤시고 후비는 이빨의 반란

밤마다 더해 깨어 새게 하네

뉘 아픔이었나

삼십 년도 전

밤마다 신음하며

이빨을 부여잡던 어머니

그것은

한세상 살아가기가 그러했던 시절에

누구나 앓던 일상

검은 시대 태어나 웅크리고 버티다 지칠 때

어금니로 모이는 앙다문 생존

그게 내게 오는 거야

고비 넘어가는 나이

어두워지면 소리 없이 찾아오던 어머니의 일상

이제 내 앓으며

눈물 밴 눈으로

내 자식들을 바라본다

엘리베이터의 여인

혼자 타는 엘리베이터

사람은 없는데 들리는 음성

'어서오세요

올라갑니다

문이 닫힙니다'

사람도 없는데 들리는 음성

기다림에 젖은 여인의

건조한 음색

발과 머리에 감긴

외줄, 외길 인생

여분의 여유조차 없는 통로로

정확한 속도로

어차피 내려와야 할 곳으로

동행해 오르는 그녀

그 여인에 안겨 어딘가로 오른다

외가닥에 발과 머리를 묶여 떠는

인간 엘리베이터

오늘도

결국은 내려올 곳에서

'올라갑니다

문이 닫힙니다'

끌려가고 있다

           상가

그 사람 가고 촛불 두 자루만 남았다

검은 리본 두 가닥이 가둬 논 세상

다들 저 세상이라 부르는

리본 뒤에 웃고있는 사람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이 세상과 다르다고

촛불은 그 사람처럼 손짓하고

죽어봐야 남는 것에 대해

간절해지는 시각

문풍지에 다녀 가는 호흡을

저리게 듣는 오늘 같은 밤이면

한 인생길이 한갓 눈발보다

먼저 녹아 잊히는 줄 혹여 알았는가

세상은 상가의 울음소리로 열려

여명은 붉게 걸어오는데

새벽에도 지는 잎새

우리 날마다

맞이하는 일과 보내는 일로

가슴 한 쪽씩 식어가는 날을 살다가

문득 만나는 세상

그 사람 가고

흔들리는  두 손짓만 남았다

장구

장구를 두들겨

꽃잎의 속삭임

괴성벽력까지 캐어내는 저 촌노

서리 얹힌 머리칼 아래 고랑 굵은 하회미소

제 신명에 발치 끝 당겨 올려 밟고 날듯 앉으며

저 세상 소리까지 얽고 풀고 맺힌다

그런 얼굴이었나 이승

태어날 때부터 얽힌 세사는

평생 풀어도 한으로 꼿꼿해

장구채 끝에 닿아 떠는 살갗처럼

마냥 살아도 시린 세월

서녘

멍든 북 낯에 공명으로 떠는 설움

헛헛한 가슴에 터질 듯 부딪쳐오다

눈 오면 상가]

             위의 눈과

        위의

눈 위의

눈 앞의

        앞의

              눈과

                   눈 뒤의

              눈끼리

                    눈도

길을 잃고 헤매는 날

그대의 이름이 나를 휩싼다

소용돌이치는 첫 순정의 떨림

그 경험의 경련이 들판으로 바다로

미친 듯 지르던 외침인 양

저승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거리마다

그대 이름으로 엉켜드는 소복 입은 자음 모음

살아서 방황처럼 날 찾지 못해 떠도는 바람

저승의 귀를 갖고도 듣지 못하는 목소리 속에

끝내 내려 딛지 못하는 눈 한 송이

어느 사랑했던 혼이 죽어

분분이 외로움 하나 만나러

이 밤을 찾아 드는가

눈이 오기로 세상은 상가

그대 오기로 저승도 상가

만장 휘날리는 아득한 하늘  

머잖아 눈이 그칠 것과

인연도 물이 될 것을

떠도는 혼백마다 말해준다

가르치는 죄

제 갈 길도 몰라 비틀거리는 사람

많은 한숨과 불면의 골목을 헤메면서

한 몸의 자유도 붙들지 못한 채

사람 가르치는 일을 한다

사람의 인생에 여덟팔자를 놓고 넉사자를 논한다

순수와 열망의 꽃봉오리들에게

사는 삶이 아닌 살았으면 하는 인생을 말한다

가끔은 빛보다 어둠을 알리고

꿈보다 절망을 덫칠하고

사랑보다 노여움을 전염시키진 않았을까

사도의 길에 사표가 되셨던 구상 스승님

삶과 글과 말이 포개어도 하나이셨던 분

큰 스승 가는 대도에 꽉차게 걸으셨던

서정주 스승님

김동리 스승님

제자라기 조차 못할 부끄러운 얼굴로

내 걷는 가르침의 길

세치 혀의 미망迷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