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사람 이야기

사람 하나의 행복

구준회 제2시집

새벽 새

새벽에도

새들은 운다

밤새 생각한 그리움이 터지는 시각

이 가지 저 가지

밟아 구르며 운다

오래 외로우면

소리가 난다

시작 메모

살아오며 버리지도 못하고 깊이 빠져들지도 못하고

져온 짐이 있다. 부끄러워 내놓지 못했던 못난 자식

을 세상에 내놓는다. 어떤 얼굴로, 얼마나 변하면서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매듭을 지어 어제를 버

리고 내일을 당겨야함을 생각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

의 날들에도 걸어야할 길은 이어져 있다.

돌아본 길 저편에 남은 이들, 기억에 박제된 이들, 아

직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이들, 사람 배우러 왔다가

다 배우지도 못하고 가는 것 같다. 나 살게 해준 풀,

꽃, 나무, 산, 그 스친 편린들을 지울 수 없다.

왜 이리 고마울까.

사람 하나의 행복

제1부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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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하나의 행복

이 세상 살다

사람 하나 알고 갑니다

노을 지는 산기슭에서

노을에 묻어나던 사람

갈대 우는 강변에서

갈대꽃을 데려가던

바람 속의 사람

한때는 상처였고 아픔이던

끝내 못 만나고 갈 사람

사람 하나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한 줄기 큰길이 되어버린 지금

사랑의 이름으로 남은 사람 하나 있어

배웠습니다

복사꽃 지던 날에

그 큰 나무의 꽃잎

하나하나 눈물이 되던 날에

이별 후 사랑도 긴 세월 하다보면

행복이 되던 것을

당신 그림자

당신과 나 만날 길 없기에

그림자는 밤마다 외출을 합니다

당신이 있을 곳 빌딩 사이 어디

담 넘고 길 건너 어디

당신이 느껴지는 곳이면

머물다 새벽에 돌아옵니다

몽유병인 듯 기억에 남지 않는

이 외출은 참으로 오래된 습관입니다

당신의 그림자와 나의 그림자가 만나

무슨 얘길 할 수 있겠습니까

둘이 앉아 어느 머언 곳을 바라보며

침묵하다 왔는지

그림자는 말하지 않지만

그 어둠의 깊이로

대화의 서글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긴 세월의 새벽마다

낙서

너를 상대로

끊임없이

낙서를 하며 산다

써도 써도

만족 못하는 건

그만큼 내게 있어

너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마음에 써온,

다독여도 솟아나는

물어 보고픈

말들

참아 논 눈물은

어디서 비가 되랴

사람 이야기·1

사람이 좋아

사람의 마을에 사람과 함께 삽니다.

사람이 아프게 해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가녀린 마음을

사람이기에 때로는 흔들려도

사람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꽃이고

빛이고

길이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을 얻고 행복한 일도

사람, 사람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사람만큼 저 사람도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게 하렵니다

사람과 사랑은 닮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람을 낳고

사람으로 사랑을 이어가니까요

오늘은 아파도 기다리겠습니다

사람이 있는 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한

끝내 사람이 해답이니까요

사람 이야기·2

산다는 게 사람 알다 가는 거다

죽는다는 게 사람 놓고 가는 거다

이 땅에 등 밝히고 사는 이

바닷가 모래알 처럼 많아도

내 아는 이 날 아는 이

반가울 얼굴 몇인가

깜깜한 밤 바닷가를 달리다

흰 모래에 물어보라

무엇이 부서지면 백사장이 되는지

바위섬 웅크리고 있으면 물어보라

무엇이 응어리지면 섬이 되는지

그리움이다

모두가 사람 때문이다

떨어져 있다는 거나

혼자 있다는 거나

따로 있다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외로워 보면 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 좋아하지 않으면

한 게 없음에랴

사람 잘 알고

사람 잘 사랑하다 가는 이만큼

행복한 이 있을까

사람은 가도 사람에 의해 남는다

사람 이야기·3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산다

소나무 그리다 외로우면

스스로 죽는다

사람은 사람이 없으면 죽는다

사람 부르다 외로움 혹독히 파고 들면

홀로 죽는다

사람이 몹시도 보고픈 날

차창 한 장 너머로 영원한 이별 되고

비 한 방울 깨져 가는 바다가 다르다

함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섬이 된다

이 땅 골골 지천으로 불 켜고 살아도

네가 부를 사람

너를 불러

따뜻하게 그릴 사람 누군가

산다는 것

사람 찾다 가는 것이다

사람 지키다 가는 것이다

빈자리

그대를 보내고 열차를 탔다

철교를 건너고 풀밭을 지나

하늘 보다 머언 곳으로

그리움이 실려 갔다

30년, 40년

창안과 창밖 사이

추억이 앉고, 네가 있다

빗물 흐르는 얼굴이

흰 꽃을 흔든 뒤 자꾸 사라진다

머잖아 나도 꺼질진데

남은 자의 주름이, 눈빛이

물로 스치는

저 곳은 그대의 세상인가

나의 세상인가

빈 차창

기인 세월 따라온 사람이

자욱자욱

지워져가는 눈물자리

너

바삐 사랑을 열고

민들레 꽃씨 천지에 날리는

행복이라도 한 포기

피우다 져야 할 것 같은 이 봄

사랑하고 싶었다 부스러지도록

홀연히 찾아와

몇 글자 안부를 남기고

또 떠난 듯 오지 않는

편지 같은 너

사랑할 시간이 점차 짧아져 가고

몇 눈금 안 남은 생이

사랑을 재촉하는데

떠난다는 것이 한갓

사라짐으로 마감하는 덧없음을

너는 생각이나 쌓아 봤을까

풀언덕 봄 하늘 밑에서

말하노니 들리느냐

민들레

하늘에 맴도는 저 목소리

가십니까

산까치 철없이 우는데

님들은 자꾸

푸른 산으로 떠나고

한 번도 당신을 위한

울음이 되어주지 못했고

한 번도 당신을 위한

촛불이 되어주지 못했기에

바람은 울면서 이 밤을 지나고

먼 곳에서 사람 부르는 파도는 치나봅니다

운해가 님을 가려 아스라한 저승

남겨진 시만이 햇살로 퍼지는데

사람이란 정녕 이뿐인 것인지

내 손에 남은 생존 한줌

가시는 길에 꽃잎 되어

아프게 아프게

밟히렵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아니라

눈이 아름답기 때문이지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슴 때문이지

뭐 하나 남길 것 없는

뭐 하나 안타까울 것 없는 세상을

아직 그리워하는 건

안의 어딘가에

꽃씨 하나 숨어 있기 때문이지

눈물 너머 저 창 밖의 하늘에

홀로 가는 구름이 안타까운 것은

어딘가 두고 온 사람이

함께 울기 때문이지

꽃무늬 상처 때문임을 안 후

한 순간이라도 눈물보다

더 사랑하다 죽을 수 있다면

가지 끝에 걸린 하늘이

서녘마다 날 부르는 소리가

저리도 붉지 않을 걸

마을의 불빛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없다면

나의 조명만으로

이 밤을 막을 수 없네

마당을 밝히는

몇 개의 외등만으로

사랑을 지킬 수 없네

지나는 자동차 불빛

길을 가리키는 신호등 불빛도

깜빡이는 희망되어

모든 밤을 함께 해주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왔네

홀로 가는 길에

한잔 커피 내음이 되어 준

마을의 저 불빛이 없다면

살수록 캄캄해지는

이 어둠을 견딜 수 없네

남 몰래

내가 못해 준

내가 챙겨주지 못한

향그러운 사람의 빛을

끊임없이 던져 주고 있네

가을산

비봉 정상

낙엽 옆에 누워 눈썹 닫으면

맑게 뜨는 하늘

나도 없다

너와 나

어느 하늘 끝 떠돌다

부끄럽게 비껴갔을지라도

어언

낙엽이 온 산을 덮으며

부서져 간 시간 내내

기억으로만 읽어온

너의 미소 때문에

따스한 눈물 한 조각 품고

이 지상의 날들을 살았더랬는데

오늘은 왜 열리려는가

이 그리움

분수처럼 터지는 낙조가

한 산정에

두 어둠으로 내려 앉는다

사랑니

사랑니가 빠졌다

내 사랑 하나 뿌리채 뽑혀

누웠다

어느 먼 곳에서

사랑이 떠나간다

긴 세월

여러 인연이 스쳐도

언젠가 사랑이 올거야

나를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신이 맡긴

유일한 약속

내 몸에서 사랑이 떠났다

사람들은

앓던 니라고 말한다

저녁·1

누구에게나

저녁은 오고

어스름은 오고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길에서 길을 묻는

출구 없는 세월

저만치

아파보이는 그대와 더 아픈 나와

나란히 지는 해를 본다

평생을

스치는 수밖에 모르던 길들

산모롱이 손짓으로 헤지고

저녁 속으로 들어서는

옅은 산 너머 흐려지는

산 너머 산

안길 곳 없는 각자의 그리움만

저녁을 넘어온다

한 채 한 채의

살다 간 사람들

산 너머 산

산 위에 산

그렇게 쌓였던 것을

산 밑에 산

산 안에 산

그렇게 흐느끼던 것을

지운다

저녁·2

집으로 향해 가는 길

나의 저녁은 무엇 때문에

이리도 목이 메이는 걸까

약속은 낯설게 먼데

애들처럼

채소가 자라고

밭에는 씨가 자라는데

저녁은

그리워야할 것이 필요한 시간

산모롱이 휘돌아가는 길도

초가의 연기도 지우고

미루나무 하나 둘 눈물

사라지리니

산 위에 산

그 뒤에 산

산

저녁을 맞고

해거름과 함께 안개는 오리니

사람의 마을에 머무는 이런 날

망설이다 흔치 않은 사랑 하나 이루다 지나니

사람마다 저녁이 있어

지워지는 사람들

기억을, 노래를, 추억을

미루나무 하나 둘

저녁이 되면 슬퍼오는 하늘따라 가슴 하나

내 안

아직 거친 꿈은 남았는데

세상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새해

한 해의 끝에 서서

함박눈을 맞으며

이땅을 향한

하늘의 소리 듣는 사람들아

세상의 그리움이 모두 모여

함박눈으로 돌아온단다

눈송이 하나마다 보고픔이

눈송이 하나마다 기도가

새해를 이룬단다

또 한 해를 사는 사람들아

남은 날 동안

사람 그리워하는 마음하나로

오직 기도만을 새겨간다면

천지로 돌아오는 저 눈처럼만

사람에

눈 뜰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이루어지나니